• 한국문화사
  • 33권 삶과 생명의 공간, 집의 문화
  • 4 주 생활용품
  • 02. 주거 생활의 기물과 시대
  • 전대와 후대 생활 기물의 차이점
  • 2. 뒤주
정대영

뒤주는 곡식을 담는 용기를 말하는데 적재할 용량에 따라서 크기가 각기 다르며 다른 기물에 비해 크기의 편차가 매우 심하다. 또한, 제작형식이 골주 중심이든 널 중심(곡궤)이든 제작형태에 구속받지 않고 곡식을 저장하는 고유의 용도만 동일하다면 통칭하여 뒤주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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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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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가족 구조에서는 곡간과 별도로 수확기에 따로 저장공간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벼를 담는 용도로는 일반적으로 집채만큼 큰 크기의 벼 뒤주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후대에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핵가족화되면서 뒤주는 정미(精米) 공정을 거친 쌀을 담는 뒤주로 변화되었다. 전대에서는 각 가정마다 벼를 방아에 찧어 껍질을 벗겨 밥을 지었으나, 후대에 와서는 벼가 정미소를 거쳐 유통됨으로써 단기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쌀만을 담아두는 용도로 다량 생산되었으므로 전대의 뒤주와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도세자(思悼世子)가 갇혔던 뒤주187)사도세자는 조선 후기 영조의 둘째 아들, 영빈[李氏]의 소생으로서 이복형인 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난 후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영조 25년 庶政을 대리하게 되었을 때 세자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경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을 우려한 노론들은 貞純王后 김씨와 함께 그의 잘못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하여 무고하는 등 세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762년(영조 38) 세자의 비행에 대한 10조목을 영조에게 상소하였고, 이 일로 인해 영조는 세자를 불러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세자와 어머니(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죽게 하였다.는 후대의 작은 형태가 아니라 전대의 큰 곡궤(穀櫃)였거나 집채만큼 큰 뒤주였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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