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1 음악의 근원
  • 02. 음악과 이념
  • 조선 예악과 연향
송지원

왕실의 연향은 오례 중의 가례나 빈례에 속하여 행해졌다. 가례에는 왕실의 혼례를 비롯하여 책봉례, 존호, 조하, 조참(朝參), 상참(常參), 관례(冠禮), 문무과전시(文武科殿試), 왕세자입학의(王世子入學儀), 양로연, 음복연(飮福宴) 등이 있다. 이들 의례는 각각 다양한 내용과 목적으로 연행되었다. 이 가운데 연향의 성격을 지닌 의례에서는 음악과 춤이 주요 절차로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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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41년기로연도 제4폭 부분
영조41년기로연도 제4폭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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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일정한 나이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을 때, 왕·왕비·대비 등의 생신, 회갑 또는 칠순을 맞이하였을 때,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날과 같은 경사가 있을 때면 진연(進宴), 진찬(進饌), 진작(進爵) 등의 이름으로 연향이 크게 베풀어졌고, 해마다 음력 3월이면 관리들 중 80세 이상이 된 사람을 위해 양로연을 열었다. 종묘나 사직제사를 왕이 친히 행하거나 큰 경사나 상서 등이 있을 때, 군대가 출정하여 승리하였을 때는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하의(賀儀)를 행하였고, 주요 제사를 행한 뒤에는 특별히 음복연을 베풀어 제사 지낸 술인 복주(福酒)와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제사를 잘 치른 후에 내리는 복을 고르게 나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때는 다양한 음 악과 궁중 정재(呈才)를 연행하였다.

1744년(영조 20) 영조가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는 연향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연향을 열어 전체 9잔의 술잔을 왕에게 올렸고, 술을 올릴 때는 음악과 궁중 정재를 연행하였다. 정재의 반주는 국가 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된 악공이, 춤은 소년 무용수, 무동이 담당하였다. 첫 번째 술잔과 두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여민락만(與民樂慢)이 춤 없이 음악으로만 연주되었고, 세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의 반주에 맞추어 초무(初舞)를 추었으며, 네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정읍만기(井邑慢機)의 반주에 맞추어 아박무(牙拍舞)를, 다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보허자령(步虛子令)의 반주에 맞추어 향발무(響鈸舞)를 추었다. 또 여섯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여민락만의 반주에 맞추어 무고(舞鼓) 정재를 추었고, 일곱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보허자령의 반주에 맞추어 광수무(廣袖舞)를, 여덟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여민락령(與民樂令)의 반주에 맞추어 향발무를, 마지막 잔인 아홉 번째 술잔을 올릴 때는 보허자령의 반주에 맞추어 광수무를 추었다. 잔치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는 여민락과 향당교주(鄕唐交奏)를 연주하는 가운데 처용무(處容舞)를 추었다. 처용무는 파연악무, 즉 잔치를 마칠 때 추는 춤의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종묘제나 사직제, 문소전 제향, 회맹제(會盟祭), 부묘의(祔廟儀) 같은 의례를 행한 후에는 음복연을 행하였다. 음복연은 “신의 은혜를 멈추지 않는다(不留神惠)”는 의미로 행해졌으며, 복을 받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여겨 베풀어졌다. 이때는 주요 절차마다, 즉 술을 올릴 때, 상을 올릴 때, 꽃을 올릴 때, 특정 음식을 올릴 때, 왕세자가 절할 때, 정재를 연행할 때 의례의 진행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였다. 조선시대 궁중의 가례에서 연행하는 악무의 종류는, 특정 의례에서 어떠한 악무를 연행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대개 선행의례를 참고하여 예조가 왕에게 품(稟)하면 왕이 이에 대해 지(旨), 즉 결재하는 형태 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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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의궤』 정재도 중 무고
『무신진찬의궤』 정재도 중 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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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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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복연은 일반 연례(宴禮)에 준하여 행하였기 때문에 외연(外宴)으로 베풀 때는 초무, 아박무, 향발무, 무고, 광수무, 처용무 등 소년 예술가인 무동이 출 수 있는 정재를 연행하였다. 외연이기 때문에 여성 무용수인 여령(女伶)이 아닌, 무동이 추는 종목으로 구성된 것이다. 여성이 주인공인 연향인 내연(內宴)으로 베풀어지는 음복연도 있는데, 이때는 외연과는 다소 다른 공연 종목을 갖추게 된다.

빈례는 외국 사신을 위해 베푸는 연향 의례가 주를 이룬다.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찾아온 중국의 사신을 위해 왕이나 왕세자, 종친 등이 베풀어 주는 잔치와, 일본이나 유구국(琉球國)의 서폐(書幣)를 받은 후 베푼 잔치의 의례가 빈례에 포함되었다. 연조정사의(宴朝廷使儀), 왕세자연조정사의(王世子宴朝廷使儀), 종친연조정사의(宗親宴朝廷使儀), 수린국서폐의(受隣國書幣儀), 연린국사의(宴隣國使儀) 등의 의례가 빈례에 속한다.

중국 사신이 서울로 들어오는 경로는 조선의 최북단인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마주치는 의주에서 시작된다. 압록강 물가에 있는 의순관(義順館)에 여장을 풀고 머문 이후 사신들은 정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 등지를 거쳐 고양의 벽제관(碧蹄館)에서 1박을 한 후 입 경한다. 사신들은 입경 이후 통상 열흘 이상을 서울에 머무는데, 하마연(下馬宴)·익일연(翌日宴)·회례연(回禮宴)·상마연(上馬宴)·별연(別宴)·전연(餞宴) 등의 공식 연향에 참가한다. 또한, 서울의 절경인 한강의 유관(遊觀)도 방문 일정 가운데 반드시 포함되었다. 사신이 입경한 후 베푸는 연향에서는 보허자·정읍(井邑)·여민락 등의 반주에 맞추어 광수무·아박무·향발무·고무 등의 궁중 정재를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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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정 별연도
제천정 별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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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람은 사신들의 관광 코스이자 문화 교류의 현장이다. 보통 하루나 이틀 동안의 일정으로 유람하였는데, 한강에서도 명승지로 이름난 제천정(濟川亭)·압구정(鴨鷗亭)·잠두봉(蠶頭峰)·희우정(喜雨亭) 등이 자주 들르는 장소였다. 특히, 제천정은 중국 사신들이 즐겨 시를 짓고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의 학자 관료들과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기도 하였다. 사신의 한강 유람 때는 음악과 춤이 수반되는데, 『악학궤범』에 따르면 이때 동원되는 연주인은 일반적으로 악사 1명, 여기(女妓) 20명, 악공 10명 등이었다.

이와 같이 왕실의 연향은 오례 중의 가례나 빈례의 하나로 행해졌다. 이들 연향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행해졌는데 그 규모와 내용 은 연향 주인공의 위상에 따라 차등화되었다. 또 연향의 시행 목적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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