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1 음악의 근원
  • 04. 음악과 경제
  • 음악과 보상
송지원

음악의 소통 현장은 노동 현장이기도 하다. 노동 현장은 경제 행위가34) 사전적 의미에서 경제행위(economic action)는 경제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재화를 획득하고 사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소비자가 소득을 소비재에 지출하는 행위와 생산자가 자금을 생산요소에 할당하는 행위 모두가 경제행위에 해당한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음악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을 얻고, 감상자의 입장에서 연주 행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였을 때 경제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루어지는 곳이다. 일정한 외부적 수요에 따른 연주, 즉 수요에 대한 공급의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연주 행위와 그에 대하여 일정한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노동의 한 형태가 되며 이에 대해 이루어지는 보상은 노동의 정당한 대가이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 형태는 보편적인 위상을 지닐 수도 있지만 음악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장과, 음악 수요의 양상이 다양하므로 음악 연주에 대한 보상 형태는 일정하지 않다.

개별 음악인들의 연주기량이 다르고 음악의 수요 형태가 다르며, 음악 연주의 목적 등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음악이 연주되는 자리를 마련한 주최측의 사회적, 경제적, 지적, 문화적 특수성이 있고 악무(樂舞)를 연행하는 사람들의 기량에 따른 차별적 대우 등, 여러 복합적 변수가 있으므로 연주 행위에 대한 보상체계와 그 행위 를 후원하는 틀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 연주자들에 대한 후원은 연주자들을 직·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단순한 취미 이상의, 전문 음악인으로서 예술적 자질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연주 능력은 연주자로서의 최고 대우를 보장 받는 일이고 보다 안정된 후원제도에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연주에 고도의 전문성을 지니기 위해, 최고의 예술적 경지를 얻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때로는 자족에 그치기도 하고 거액의 포상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명예직을 수여하는 등의 정신적 보상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보상은 연주자의 생활기반이 되는가 하면 새로운 예술 창조의 물적, 정신적 토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특히, 조선 후기는 경제력의 향상과 함께 그 어느 시기에 비해 예술의 향유층이 두터워진다. 예술 전반의 향유층이 두터워진다는 것은 음악을 비롯한 예술 전반의 수요가 이전 사회에 비하여 점차 확산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음악 수요의 확산은 음악을 연주할 사람들에 대한 수요를 전제한다. 조선 후기 서울의 경제적 성장은 서울 지역을 음악 수요가 가장 왕성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서울 중심의 새로운 음악 문화가 창출되기도 한다. 음악이 소통되는 다양한 현장에서, 다시 말하면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이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졌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보상 형태에 대해 파악하는 일은 전통시대의 예술인들, 다시 말하면 그 신분이 사회적으로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술인들이 특정한 예술 후원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 사회에서 어떠한 물적 토대에서 예술활동을 전개해 나갔는지를 알아보는 일과도 같다. 물론 조선시대에 특별하게 규정된 예술 후원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은 다양한 후원 형태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 후원이 정기적이고 지속적이며 일정 계약 관계를 유지하는 안정된 형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후원자, 후원 집단, 후원 기관의 직·간접적인 후원은 조선시대 예술인들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일정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후원에 의한 예술인들의 활동양상과 그 보상에 따른 역학 관계를 가늠해 보는 일은 조선시대 예술인들을 활동하게 하였던 사회·경제적 토대를 진단해 보는 일이며 나아가서는 조선시대 음악사회의 구조를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실 조선시대 음악인들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 형태, 후원제도에 대해 연구하는 일은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연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18세기 서양의 음악가들의 경우 후원자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서가 일부 남아 있기 때문에 후원자와 음악가가 어떠한 조건으로 합의하고 연주활동을 벌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음악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격의 계약규정이나 계약서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음악계에서 음악가와 후원자와의 관계는 성문법으로 가시화된 규정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관습적으로 전해지는 암묵적 합의에 의해 움직였다. 또 획일화되었던 규정을 일률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른 양상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음악가와 후원자의 관계와 후원 양상은 한 마디로 다양하다.35) 송지원, 「여성음악가 계섬」, 『문헌과 해석』 23, 2003.

조선시대 음악가들의 연주행위에 대한 물적 보상이 이루어진 현장을 살펴보자.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송흥록(宋興祿, 1801∼1863)의 경우 그 명성만큼이나 출연료도 상당하여 양반들의 부름에 응하여 소리를 하게 되면 그 행하(行下), 즉 출연료가 ‘천냥금’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는 상경한 지 2년 만에 수만 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36) 朴晃, 『판소리 二百年史』, 思想硏, 1987, p.70. 물론 ‘수만 금’이란 액수에 대하여 정확한 환산은 불가능하지만 상 당한 액수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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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흥록 생가
송흥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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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9세기에 활동하였던 권삼득과 같은 인물은 한 곡을 불러 1천 필의 비단을 받았다고 하였다.37) 이 내용은 송만재의 『관우희』 제49수에 “長安盛說禹春大 當世誰能善繼聲 一曲樽前千段錦 權三牟甲少年名.”라는 기록에 보인다. 판소리 명창들의 예우를 물질적 보상의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대우이다. 단기간에 수 만냥, 수 만금의 사례도 적지 않다. 물론 이는 명성을 얻은 명창의 경우이다. 다만, 출연료의 액수를 표기하는 관행에 있어서는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고, 정확한 액수가 아니라는 점은 감안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시기 음악인들의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에 관하여 산발적으로 보이는 기록들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지닌 음악인들의 출연료는 당대 부자들의 재산규모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액수에 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는 몇몇 판소리 명창들의 물적 보상 형태를 보면 일급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판소리의 경우 19세기는 이미 수많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거기에는 귀 명창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두터운 애호가 층이 판소리의 진가를 인정하고 명창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기에 그에 따른 장르의 발전이 아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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