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1 음악의 근원
  • 04. 음악과 경제
  • 음악 보상: 후원의 역학 관계
송지원

연주자들에게 치러지는 여러 형태의 보상은 예술적 성취도와 일정 정도 역학 관계를 지닌다. 악공(樂工)이나 악생(樂生)의 신분으로 장악원에 소속되어 연주하는 음악인들의 경우, 업무의 과다와 중요도, 혹은 연주 수준의 고하와 관계 없이 연주에 대한 보상은 일률적으로 매우 낮다. 이러한 현실은 그들의 직업적 자존감과 비례한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히 ‘보상’의 문제만이 아닌 악공이나 악생의 ‘출신 성분’이라는 면에서 조선시대 신분·사회적 정황도 작용한다. 그러나 보상의 수준이 결과적으로 조선 왕실의 여러 의례에서 연주되는 음악의 수준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왕실의 의례에서 음악 연주를 담당한 이들이 곧 장악원의 악공과 악생들이고,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늘 완성도 높은 상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문헌에서 드러나는 ‘악공과 악생들의 연주에 대한 우려’와 관련한 기록이 그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장악원 음악인들의 의무연습 일수와 출석 일수 등을 『경국대전』, 『대전회통』이나 『육전조례』와 같은 법전에 규정해 놓은 것도 한편으로는 연주수준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법적 장치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연주를 소홀히 한 악인들에 대한 체벌 규정과 같은 것도 유사한 장치에 해당한다. 특정한 후원 없이 열악한 현실에 처해 있는 음악인들에게서 최상의 음악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런지 모른다.

그에 반하여 ‘준비된 연주자’로서 높은 연주 수준을 갖춘 민간의 음악인들은 각종 음악 수요에 부응하여 일정 후원을 받으면서 연주에 응하여 장악원 소속의 음악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하게 높은 보상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가들 가운데에는 서울 전 지역은 물론 지방까지 이름이 난 연주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받는 출연료는 상당한 액수에 달하기도 하였다.

예술적 성공이 세속적 성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 성취도와 사회적 보상의 관계는 비례하는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세속의 이름을 얻기 위한 음악인들의 노력은 한편으로는 예술적 성취를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연마한 음악에 대한 평가를 받기 위한 방편이며, 또 사회적 보상을 높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해석된다. 19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광대들에게서 보이는 여러 노력은 그러한 정황을 보여준다.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戲)』(1843)에는 판소리 광대들이 연주할 무대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 보인다.40) 송만재의 『관우희』 제44수에는 “劇技湖南産最多 自云吾輩亦觀科 前科司馬後龍虎 大比到頭休錯過(광대꾼은 호남에서 제일 많이 배출하니, 우리도 스스로 과거보러 간다 이르네. 먼저는 司馬試요 나중은 무과시험, 과거철 다가오니 거르지 마세나).”라는 내용의 시가 전한다. 서울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이 있을 때면 판소리 광대들도 그들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을 보는 계절이 되면 그 일정에 따라 함께 이동하였다. 과거시험을 치른 후 베푸는 잔치판에는 으레 판소리 광대들의 무대가 펼쳐졌고, 일종의 데뷔 무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대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판소리 광대는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이처럼 과거시험 이후에 여러 곳에서 열리는 무대는 과거시험과 연결된 것이므로, 과거시험이 치러질 때면 많은 판소리 광대들도 마치 과거를 치르는 듯한 각오로 준비를 하였다.41) 이혜구, 「송만재의 관우희」, 『한국음악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75. 또 그러한 무대에서 인정받는 것은 판소리 광대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였고 나아가 어전명창(御前名唱)으로42) 헌종(1835∼1849) 때부터 판소리 광대들이 御前에서 소리하여 御前名唱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발탁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들의 연주에 대한 보상은 보통의 광대보다 훨씬 높았다.

이러한 상황은 연주행위에 대한 보상의 역학 관계를 알려준다. 양반 집단의 수요가 연주자 집단에게 동기유발을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개별 장르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양반과 판소리 광대 양쪽 집단이 필요에 의해 연계되어 장르의 독자적 발전으로까지 이어지게 하였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무대는 판소리 광대들 간의 기예 겨루기 현장이 되기도 하여 판소리라는 개체의 질적 향상을 위한 장이 되었다.

1864년 시작된 ‘전주 통인청 대사습’의 경우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대사습에서 기량을 떨치면 명성과 수입이 보장되어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소리를 공부하였고 그를 통해 많은 명창이 배출되어 판소리 최고의 융성기를 구가하여 고종시대 43년 동안 전국의 남녀 명창이 200명을 헤아리는, 판소리 사상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43) 박황, 앞의 책 참조.

이상 살펴본 과거시험 후의 유가에서 기량을 발휘하는 판소리 광대, 대사습에 데뷔하기 위한 가객들의 노력은 판소리라는 장르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이는 곧 음악 활동에 대한 보상과 그에 따르는 개체적 장르 발전의 긍정적 역학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후기로 갈수록 음악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이에 따라 음악인들의 경제적 위상도 조금씩 나아져 나라에 얽매이지 않고 사사로이 음악 활동을 하면서도 생활이 영위되는 시대가 열렸다.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 음악인이라 하더라도 자유로운 시간을 이용하여 민간에서의 음악 수요에 응할 수도 있었다. 명성을 얻은 음악인들은 연주행위를 통해 막대한 부를 거머쥐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음악의 융성한 발전양상을 설명해 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민간에서의 음악수요의 주체로서 조선 후기 음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음악 후원자들의 존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악인과 그 후원자들의 역학 관계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 수요 주체인 음악 후원자들이 원하는 음악을 공급 주체인 음악인들이 제공하고, 음악인들은 후원자들로부터 일정 형태의 보상을 받는다. 연주 행위에 대한 물적 보상과 예술적 성취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연주자들에 대한 물적 보상과 명예직 수여 등의 정신적 보상은 그들의 음악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나아가 음악인들의 개별 음악 장르의 발전에도 많은 부분 기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술 활동에 있어서 물적 토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동서양의 음악사를 두루 살펴볼 때, 경제적으로 풍부한 지역에서 새로운 예술에 대한 실험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실험, 개척, 발달된 사실과 당시 사회의 지적, 정신적 흐름을 주도해나간 그룹들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시도된 사실 등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폄하되었던 시절 예술인들의 경제적, 지적 위상 또한 높을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 후기 서울의 도시적 성장은 예술의 수요를 확대하였고 예술인들의 수요 또한 증가하도록 하였다. 연주 기량이 높은 예술인들은 연주 대가로 넉넉한 보상을 받게 되고 아울러 예술인들의 위상도 조금씩 높아지게 되었으며, 예술인으로서 갖는 자의식 즉, ‘전문인으로서의 예술인’이란 의식도 점점 깊어지게 된다.

조선 후기라는 변화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예술가들의 활동반경이 보다 넓어지면서 그들의 전문가로서의 직업의식은 점차 깊어지게 되었다. 여기에는 예술원자들이 기여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술후원자들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을 통한 음악 활동이 당대 음악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데 한 몫을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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