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1. 왕의 춤
  • 태종, 춤추기 좋아하다
조경아

정종이 2년 만에 물러나자, 왕위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방원(芳遠)에게 돌아갔다. 태종(太宗, 1367∼1422)은 왕위에 오른 뒤 태상왕인 이성계와 심한 갈등을 일으켰으며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세 있 는 신하는 공신이든 처남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하였다. 또한, 6조를 왕이 직접 장악하여 의정부 재상 중심의 정책 운영을 국왕 중심 체제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다. 또 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을 설치하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전제 개혁을 마무리 짓고,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사병(私兵)마저 혁파하였다. 이어 억울하게 공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해방시키고, 지방의 호족을 억압하여 군역을 지도록 만들었다.97) 한영우, 앞의 책,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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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릉(獻陵) 태종과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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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 중에서 춤추기를 가장 좋아한 왕이었다. 왕위(1400∼1418)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의 지위에 있을 때도 즐겨 춤을 추었다. 태종은 정종과 함께한 잔치 자리에서 춤을 추고, 신하들에게 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태종이 19년 동안 재위하면서 직접 춤을 춘 경우는 실록에 의하면 14건에 이른다. 아버지인 태상왕이 춤을 추자, 일어나서 같이 춤을 추기도 하고,98)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1월 29일 임자 ; 권4, 태종 2년 8월 4일 을묘 ; 권6, 태종 3년 8월 7일 임자 ; 권10, 태종 5년 12월 24일 병술. 형이자 상왕인 정종과 더불어 춤을 추기도 하였다.99) 『태종실록』 권4, 태종 3년 6월 13일 기미 ; 권6, 태종 3년 7월 25일 경자 ; 권21, 11년 태종 3월 28일 무자 ; 권21, 태종 11년 6월 14일 계묘 ; 권22, 태종 11년 윤12월 26일 임오 ; 권23, 태종 12년 2월 19일 갑술 ; 권24, 태종 12년 8월 15일 정묘 ; 권24, 태종 12년 10월 22일 갑술. 장인인 여흥부원군 민제(閔霽, 1339∼1408)의 집에 거둥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도, 태종은 매우 즐거워하며 일어나 춤을 추었다.100) 『태종실록』 권4, 태종 2년 8월 26일 정축. 이렇듯 태종이 춤을 춘 경우는 자신보다 윗사람인 아버지, 형, 장인 앞에서이다. 신하들 앞에서는 주로 아랫사람들에게 춤을 추라고 명하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난 뒤에는 세종과 더불어 춤을 추기도 하였다.

대개 즐거운 자리에서 춤을 추는데, 그렇지 않은 자리에서 춤을 춘 경우도 있다. 다음은 태종 3년(1403) 8월 태종이 병중에 있는 형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 ?∼1404)의 집에 문병을 가서 함께 춤을 춘 내용이다.

모정(茅亭)에 올라 잔치를 베푸니,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완산군(完山君) 천우(天祐)·찬성사(贊成事) 이저(李佇) 등이 모시고 잔치를 하였다. 이방의가 초췌하여 힘이 없으므로 앉고 서는 것을 자유로이 하지 못하였다. 사람을 시켜서 부축하여 일어나서 침석(枕席)에 기대앉으니, 임금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형의 병이 너무 심하여 초췌하기가 이와 같으니, 내가 일찍이 와서 뵙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합니다.” 하고, 또 울었다. 이방의에게 묻기를, “형이 오래 앉아 계시면 수고로움이 심할까 염려되오니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방의가 말하기를, “전하의 거둥이 쉽지 못하고, 신도 또한 병이 심하여 대궐에 나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병을 무릅쓰고 앉았으니, 원컨대 신이 취하여 눕는 것을 보신 뒤에 돌아가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해질 무렵에 이방의가 부축을 받고 서서 춤을 추니, 임금도 또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101)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8월 1일 병오.

태종은 깊은 병이 든 이방의에게 문병을 가서 병수발을 드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내려주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병으로 앉고 서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이방의가 태종 앞에서 남의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춤을 추는 모습은 처절하게까지 느껴진다. 춤을 춘 공간은 모정(茅亭)으로, 여름철에 마을 주민이 휴식하기 위해 마루로만 구성된 작은 규모의 초가지붕 건물이다. 이런 작고 소박한 공간에서 왕 이 잔치를 열어 왕과 왕의 형이 함께 춤을 추었던 것이다.

이방의는 이성계의 왕자 가운데에서 가장 야심이 적어 아우 방간과 방원의 왕위 계승 싸움에 중립을 지키고, 평소에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았던 인물이다.1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방의’ 항목 참조. 그런 이방의가 깊이 병 든 몸으로 동생 태종과의 만남에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서 있기조차 힘든 몸이기 때문에 대화만 나눌 수도 있는데 왜 이방의는 굳이 춤을 추려고 하였을까? 춤은 보편적으로 즐거움의 감정이 흘러 넘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만,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려 하거나 또 즐거움의 감정을 애써 보이려고 할 때도 나오는 듯하다.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춤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이성계의 신임을 얻지 못하여 왕위 계승에서 탈락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껴 이복동생으로 세자가 된 방석(芳碩)과 세자를 보호하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무력으로 처단하고, 이어 친형인 방간(芳幹)의 도전을 물리친 후 정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 한씨(신의왕후) 사이에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의 여섯 왕자를 두었고, 둘째 부인 강씨(신덕왕후) 사이에 방번, 방석 등 두 왕자를 얻었다. 이 중 방간은 방원과 다투다가 유배되었고, 방번과 방석은 살해되었다.103) 한영우, 앞의 책, p.277. 결국 왕위 계승의 권력 투쟁에서 형제들은 죽음과 유배의 과정을 겪은 것이다. 태종이 즉위한 지 3년이 되어 일련의 과정들을 되돌아볼 때, 형제에게는 회한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1403년에 이방의는 태종을 만나 춤을 추고, 그 이듬해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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