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1. 왕의 춤
  • 세종, 아버지와 즐겨 춤추다
조경아

태종대에 활발하였던 왕이 춤을 추는 문화는 세종 대에도 지속된다. 태종은 왕위를 셋째 왕자인 충령대군인 세종(世宗, 1397∼1450)에게 물려주었다. 태종은 물러나서도 상왕으로 군권을 계속 장악하고 세종을 후원하였다. 태종의 개혁 결과 세종은 32년(1418∼1450) 동안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유교적 문화통치의 꽃을 활짝 피웠다.104) 한영우, 앞의 책, p.279. 또한, 세종은 유교적 문화 통치를 위해 악제(樂制)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세종은 어떤 자리에서 춤을 추었을까? 상왕인 태종이 주연을 마련하였을 때, 세종은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상왕 태종이 저자도(楮子島)에 행차하여 배를 띄우고 주연을 베풀 때, 상왕이 임금에게 “일어나 춤추라.”고 명하자 세종은 춤을 추었다.105) 『세종실록』 권4, 세종 1년 6월 16일 무자. 대비나 태종의 생신 잔치에서도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세종은 태종과 함께 춤을 추었다. 태종과 세종이 유정현(柳廷顯, 1355∼1426) 등을 인견하고 주연을 베풀었을 때, “정현 등이 일어나 치사하고 각각 차례로 나아가 춤추고 연귀(聯句)를 지어 바치니, 두 임금도 역시 일어나서 춤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은 농부 열 명을 불러서 누(樓) 앞에서 농가(農歌)를 부르게 하고 술을 하사하였다.106)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5월 26일 계사. 이처럼 세종은 아버지인 상왕 태종과 함께 춤을 춘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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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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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아버지 태종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주로 춤을 춘 것은 세종의 효성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한다. 늙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어버이 앞에서 춤을 춘 노래자(老萊子)의 고사를 세종은 몸소 실천하였다. 세종의 효심은 아버지 태종의 빈소 앞마당에 무릎을 꿇고 자리를 지키다가 갑자기 쏟아진 장대비에도 꼼짝하지 않았던 일화에서도107) 김경수, 앞의 책, p.94. 잘 나타난다. 지극한 효자인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있는 자리에서 즐겨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공간에서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허물이 없었다. 세종 즉위년(1418) 11월 큰 눈이 내린 날, 인정전에서 상왕에게 성덕 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란 존호와 대비에게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란 존호를 올릴 때였다. 이 때 진책관의 임무를 맡았던 남재(南在, 1351∼1419)가 먼저 일어나서 춤을 추었는데, 세종은 남재의 풍도(風度)가 볼 만하다고 하며 ‘남로(南老)’라고 일컬었다. 태종과 세종이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니, 남재가 꿇어 앉아 세종의 허리를 안았다.108) 『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1월 8일 갑인 임금의 허리를 껴안는 행동을 감히 할 수 있었을까 싶으나, 남재는 개국공신이며 영의정까지 지낸 68세의 원로였고, 이듬해 사망하였을 때 세종이 친히 조문하였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또한, 남재는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을 지극히 삼가면서도 바깥 형식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평가 받는 인물이었다.1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재’ 항목 참조.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품성 때문에 몸의 표현이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다.

춤을 추고서 신하가 세종의 몸을 껴안는 행동은 그 다음 달에도 보인다. 12월 의정부와 육조에서 상왕인 태종에게 헌수하고 세종이 종친과 함께 연회를 즐겼을 때, 유정현 등이 일어나 춤을 추니, 두 임금이 또한 일어나서 춤을 추며 지극히 즐겼다. “박은(朴訔, 1370∼1422)이 두 임금의 허리를 안기를 청하니, 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박은이 무릎으로 걸어가서 먼저 상왕의 허리를 안고, 그 다음에 세종의 다리를 안았다.”고 한다.110) 『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27일 임인. 박은은 태조 3년(1394)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있을 때부터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에게 충성할 것을 약속하였고, 제1차, 2차 왕자의 난에서도 그를 도왔다. 그렇기 때문에 태종도 박은이 안는 것을 허락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는 술자리에서 함께 춤을 추며 신하가 임금을 안는 것을 허락할 정도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문화가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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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4년(1422) 5월 10일에 상왕 태종이 훙서(薨逝)한 이후로는 세종이 춤을 춘 기록은 드물게 보인다. 세종은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병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린 잔치에서 춤을 추었다.111) 『세종실록』 권82, 세종 20년 9월 5일 병술. 즉위 초반에는 어버이를 위한 잔치 자리에서 상왕 태종과 함께 춤을 추었는데, 아버지 태종의 훙서 이후에는 병든 형을 위로해 주기 위한 춤을 춘 기록이 한 번 더 나올 뿐이다. 이때의 춤은 우애의 춤, 위로의 춤이라 할 수 있겠다. 세종이 직접 춤을 춘 것은 대부분 즉위 초반이며, 후반기에는 음악과 춤의 제도를 논의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112) 세종대에는 악제 정비가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춤과 관련한 것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과 관련된 의절에서 쓰이는 춤에 관해서이다(『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1월 1일 ; 권19, 세종 5년 1월 1일 ; 권3, 세종 1년 1월 19일 ; 권53, 세종 13년 8월 2일). 둘째, 국내의 각종 의례 절차에 쓰이는 춤에 관해서이다(『세종실록』 권2, 세종 원년 11월 7일 ; 권27, 세종 7년 1월 14일 ; 권32, 세종 8년 4월 25일 ; 권54, 세종 13년 10월 3일 ; 권57, 세종 14년 7월 29일 ; 권89, 세종 22년 6월 13일 ; 권98, 세종 24년 11월 24일 ; 권57, 세종 14년 9월 3일). 셋째, 춤을 담당하고 있는 재랑이나 무공의 선발과 처우에 관련된 내용이다(『세종실록』 권19, 세종 5년 2월 4일 ; 권31, 세종 8년 3월 1일 ; 권27, 세종 7년 1월 20일 ; 권53, 세종 13년 9월 23일 ; 권54, 세종 13년 12월 25일 ; 권50, 세종 12년 12월 15일). 넷째, 세종대에 와서 처음 실시되는 무동제도에 관한 것이다(『세종실록』 권56, 세종 14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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