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1. 왕의 춤
  • 성종, 백성과 함께 춤을 추다
조경아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25년(1469∼1494) 동안 직접 춤을 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성종 6년(1475) 9월 인정전에서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등에게 양로연을 열어 줄 때의 일이다. 정인지가 성종에게 재위 기간 동안에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자 성종은 정승 등의 보익(輔翼) 덕택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술을 돌리고, 종재(宗宰)와 노인에게 춤추게 하여 즐거움을 다하였다. 또한, 성종은 “경 등이 매우 즐거워하는 것을 보니, 내 춤추고자 하노라.”고 하면서 춤을 추었고, 그 춤을 바라보던 뭇 노인들은 눈물을 떨구기까지 하였다.114) 『성종실록』 권59, 성종 6년 9월 6일 임자. 연로한 신하인 정인지 등을 보면서 성종은 지난 일들을 생각하였을 것이고, 자신을 힘껏 보필해 주고 이제 노인이 된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춤추었을 것이다. 성종의 춤을 바라보던 노인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성종의 마음이 춤으로 잘 전달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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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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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476년에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을 때에도 성종은 참석자들과 어울려 춤을 추었다. 종친인 월산대군 이정(李婷, 1454∼1488)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입시(入侍)하였고, 참석한 노인들이 모두 122명에 이르렀다. 이때 성종은 신하와 노인 들에게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도록 명하였고, 자신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115) 『성종실록』 권71, 성종 7년 9월 12일 임자. 대개 양로연에 서민들까지 초대되는 관례를 생각하면, 성종은 서민층의 노인들과도 어울려 대동(大同)의 춤을 춘 것이다.

1476년 1월에 인정전에서 음복연(飮福宴)을 베풀었을 때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이정 등이 차례대로 술잔을 올리자, 임금은 종친 및 인척과 신하들에게 명하여 일어나서 춤을 추도록 하였다. 조금 후에 또 명하여 일어나서 춤추게 하고, 임금 또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116) 『성종실록』 권63, 성종 7년 1월 11일 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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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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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종 즉위 후반기에 들어서서 춤에 대한 인식이 미묘하게 변하였다. 성종은 기본적으로 춤을 통해 정을 나눌 수 있으며, 화기(和氣)를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485년에 종친들과 함께 활을 쏘고 잔치를 베풀었을 때, 성종은 “대저 음악은 다만 혈기를 화창하게 하려는 것이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까운 친척이므로 한껏 즐기게 하는 것이다. 종친들은 내게 일어나 춤추도록 청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하며, 자신에게 춤추기를 청하라고 대신들을 종용하였다.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이미 종친을 가인(家人)의 예로 대접하셨으니, 일어나 춤을 추신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라고 춤을 청하는 말을 하였다.117) 『성종실록』 권179, 성종 16년 5월 20일 기사.

그러나 곧 이처럼 춤을 권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논핵하려는 움 직임이 일어났다. 성종은 “일어나 춤을 춘 것은 음악 소리를 즐긴 것이 아니라 다만 친족의 정을 보인 것”이라고 무마하려고 하였다. 사관은 “친족을 가까이하는 도리는 엄하게 할 수 없으나 일어나 춤을 추어야만 가까이하는 것이 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종친들은 임금이 일어나 춤추기를 요구하였으니, 이는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예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118) 『성종실록』 권179, 성종 16년 5월 21일 경오.

임금이 춤을 추는 것에 부정적인 인식이 성종 대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으로 무장된 대간(사헌부와 사간원)의 역할이 커지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대간은 성종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정국 운영의 필수적인 기관으로 자리를 굳혔지만, 탄핵과 간쟁이라는 그 본원적 기능상 국왕이나 대신과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컸다. 이러한 가능성은 성종 중반 이후 점차 현실화되었다.119) 김범, 「조선 성종대의 왕권과 정국운영」, 『사총』61, 2005, pp.55∼59. 국왕과 대간의 대립적인 관계는 국왕의 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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