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2. 선비의 춤
  • 왕 앞에서 춤추는 신하
  • 3. 비난 받았던 왕 앞에서 추는 춤, 정현조와 한익모
조경아

왕이 권유하지 않는 데도 춤을 추어 때로는 비난 받는 신하도 있었다. 이러한 비난은 성종 대 이후부터 차츰 생겨나다가 중종 이후 왕이 춤추지 않는 시기에 이르러 비난의 강도는 더욱 드세졌다. 성종 23년(1492)에 사헌부 장령 양희지(楊熙止)는 양로연에 정현조(鄭顯祖)가 일어나서 춤을 춘 것을 가지고 중죄인으로 심문하기를 청하였다. 소규모의 잔치인 곡연(曲宴)에서도 춤을 추는 것이 옳지 못한데, 예를 갖추어 베푼 잔치인 예연(禮宴)에서 춤을 춘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140) 『성종실록』 권269, 성종 23년 9월 14일 임오. 성종은 양희지의 청을 들어주지 않지만, 사헌부의 입장에서는 춤을 추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의식이 뚜렷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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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모
한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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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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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조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고,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생몰년이 불분명하여 당시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종의 측근이었다. 대개 양로연에 초대된 노인들이 왕의 권유 또는 자발적으로 춤을 추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는데도, 그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청한 사헌부의 입장이 매우 강경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1476년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에서는 참석한 종친, 재상을 비롯하여 노인 122명 모두가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였고, 성종도 일어나서 춤을 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141) 『성종실록』 권71, 성종 7년 9월 12일 임자. 이렇듯 성종 후반에 들어서 신하의 춤에 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중종 이후 임금 앞에서 신하가 춤을 춘 사례는 극히 드물다. 영조는 조선 후기에 춤을 권하였던 드문 임금이었다. 연로한 신하들을 위해 기로소에서 잔치를 베풀었을 때, 영조는 이익정(李益炡)·이정철(李廷喆)·안윤행(安允行)·심성진(沈星鎭) 등의 원로에게 각각 마주 서서 춤을 추도록 명하였다. 영조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한익모(韓翼謨, 1703∼?)에게 아들과 마주 서서 춤추기를 명하였고, 또 판서 조영진(趙 榮進) 부자와 조창규(趙昌逵) 그리고 김사목(金思穆)에게도 마주 서서 춤추기를 명하였다.142) 『영조실록』 권125, 영조 51년 7월 29일 갑술. 왕이 있는 자리에서 신료들이 춤을 춘 기록은 실로 오랜만에 등장하는데, 잔치의 성격이 연로한 대신들을 위한 기로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조가 신하에게 춤추기를 권하여 춤판이 벌어진 것이지만, 당시의 사론은 임금의 명으로 춤을 추었다 하더라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사관은 한익모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소매를 추켜들고 악공들의 사이에서 춤을 추었으며, 또한 부자 간에는 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인데도 경솔하게 일어나서 춤을 추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비웃는다고 논평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조선 초기에는 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왕도 춤을 추었고, 사관의 비판은 없었으나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의 신분으로 춤을 춘 것이 비판 받을 만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이를 통해 조선시대 춤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 초기에는 임금과 세자, 임금과 상왕 등의 부자가 함께 춤을 추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영조 대에 이르러 사관은 부자간에 춤을 춘 사실을 비판하였으니, 조선 초기와는 달라진 분위기였다. 이후 왕이 술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춤추기를 명하거나, 신하가 스스로 일어나서 춤을 춘 기록은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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