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2. 선비의 춤
  • 또 하나의 관문, 춤
  • 2. 신참자의 신고식 춤
조경아

조선시대 고참들이 신참에게 텃세를 부리는 관행은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신참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1536∼1584)에 따르면, 신참들의 신고식이자 통과의례인 신참례(新參禮)는 원래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요즈음으로 치면 권력을 등에 업은 ‘낙하산 인사’를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 신참례의 연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신참례가 애초의 좋은 취지는 잊혀진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148) 신병주, 「역사에서 길을 찾다: <7>」, 『세계일보』 2008년 2월 27일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기록된 신참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새로 급제한 사람으로서 삼관(三館, 홍문관, 예문관, 교서관)에 들어가는 자를 먼저 급제한 사람이 괴롭혔는데, 이것은 선후의 차례를 보이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인데, 그 중에서도 예문관(藝文館)이 더욱 심하였다. 새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배직(拜職)하여 연석을 베푸는 것을 허참(許參)이라 하고, 50일을 지나서 연석 베푸는 것을 면신(免新)이라 하며, 그 중간에 연석 베푸는 것을 중일연(中日宴)이라 하였다. 매양 연석에는 성찬(盛饌)을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시키는데 혹은 그 집에서 하고, 혹은 다른 곳에서 하되 반드시 어두워져야 왔었다. 춘추관과 그 외의 여러 겸관(兼官)을 청하여 으레 연석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중에 이르러서 모든 손이 흩어져 가면 다시 선생을 맞아 연석을 베푸는데, 유밀과(油蜜果)를 써서 더욱 성찬을 극진하게 차린다. 상관장(上官長)은 곡좌(曲坐)하고 봉교(奉敎) 이하는 모든 선생과 더불어 사이사이에 끼어 앉아 사람마다 기생 하나를 끼고 상관장은 두 기생을 끼고 앉으니, 이를 ‘좌우보처(左右補處)’라 한다. 아래로 부터 위로 각각 차례로 잔에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추되 혼자 추면 벌주를 먹였다. 새벽이 되어 상관장이 주석에서 일어나면 모든 사람은 박수를 치며 흔들고 춤추며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부르니, 맑은 노래와 매미 울음소리 같은 그 틈에 개구리 들끓는 소리를 섞어 시끄럽게 놀다가 날이 새면 헤어진다.149) 성현, 『용재총화』 4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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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풍속도』과거급제, 김준근
『조선풍속도』과거급제, 김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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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자가 구참자를 대접하는 잔치 자리는 단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였고, 춤과 노래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관리에 임명되고 처음으로 여는 잔치를 허참(許參)이라 하고, 그 다음에 여는 잔치를 중일연(中日宴), 50일이 지난 뒤에 올리는 잔치를 면신(免新)이라 하였다. 잔치에서 아랫사람부터 술을 부어 돌리고 차례대로 일어나 춤을 추었다고 하였으니, 술자리에서 하는 파도타기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행된 셈이다. 술만 파도타기를 한 것이 아니라 춤까지 차례대로 일어나 추는 춤 파도타기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파장하는 새벽에는 모든 사람들이 흔들고 춤을 추었다고 하니, 현직 관료의 신분으로 술 취해 춤판을 벌이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다.

과거 급제자 가운데 예문관은 신참을 가장 곤욕스럽게 하였다. 『중중실록』에 의하면 과거에 급제하여 새로 부임한 신래자(新來者)를 가장 많이 괴롭힌 기관은 예조였다고 한다. 그 부작용으로 사관(史官)으로 뽑히는 것을 꺼려하였는데, 이는 잔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150) 『중종실록』 권66, 중종 24년 11월 4일 병신. 관리들을 규찰하는 사헌부에서도 춤으로 신참들을 골려주는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태종 2년(1402)에 사헌부의 감찰 방주(監察房主) 노상신(盧尙信) 등이 새로 임명된 신감찰(新監察)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며 익살을 떨게 하여 온갖 추태를 보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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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풍속도』신은신래(新恩新來)
『기산풍속도』신은신래(新恩新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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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다 못한 사헌부 대사헌 이지(李至, ?∼1414)는 “감찰이란 무공(武工)도 아니며 악공(樂工)도 아닌데 어찌 이같이 하시오?”라고 꾸짖었으나, 노상신이 상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본방(本房)은 무공·악공의 방이다.”라며 대꾸를 해서, 결국 장관(長官)을 업신여긴 죄로 인하여 파직되기까지 하였다.151)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2월 15일 무진. 무공이 아니라고 하였을 때는 춤추는 것을 임무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원래 무공은 병조에 소속된 20세 미만의 소년들로, 제례의식 때 무무(武舞)를 추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또한, 신래자에게 썩은 흙을 당향분(唐鄕粉)이라 하여 얼굴에 바르고 음설(淫媟)된 말을 하며 종일 일어나서 춤을 추게 하였던 사건이 보고되기도 하였다. 명종 8년(1553)에 사간원은 사관(성균관·교서관·승문원·예문관)에서 신래를 괴롭히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며, 온갖 무리한 일들은 낱낱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하였다. 고문에 가까운 일을 겪은 어떤 신래자는 병을 얻어 평생 동안 폐인이 된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명종 대에는 폐단이 이 지경인 데도 바 로잡으려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였다.152) 『명종실록』 권14, 명종 8년 3월 30일 병오.

신참례는 신참으로서 치르는 일종의 신고식이며 통과의례였다. 그러나 통과의례치고는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서 평생 폐인이 되는 경우에까지 이르렀다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심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고참의 강요로 추는 신참의 춤은 유희의 경계를 넘어서 고통의 춤이기도 하였다. 고참들이 괴롭히는 방식은 갖가지였으나 그중엔 춤도 포함되었다. 왜 춤으로 괴롭혔을까?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일상적인 방식대로 하라고 하면 그것은 괴롭힘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선비들이 일상에서 춤을 추며 살지 않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치일 수 있다. 신참자들이 추는 춤은 스스로 즐거워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추는 춤, 남의 웃음거리로 전락된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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