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3. 백성의 춤
  • 양로연에 초대된 노인의 춤
  • 1. 궁궐 양로잔치에 초대된 할머니, 할아버지의 춤
조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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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연도첩』 경수연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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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서 효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효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개인 윤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효제충신(孝悌忠信) 등과 같이 ‘충’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국가 통치의 가장 기본적인 이념으로 인식되었다.158) 이재영, 「조선시대 『효경』의 간행과 그 간본」, 『서지학연구』 38, 2007, p.325. 그런 의미에서 효도로서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교화하는 효치(孝治)를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천하를 효도로 다스림은 나의 노인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남의 노인 또한 대접하는 것이다. 임금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면, 천하가 화평하여 재변이나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노인들에게 베푸는 경로 잔치격인 양로연(養老宴)을 마련해서 신분이 높은 벼슬아치에서 서민들까지 초대하였다. 서민으로서는 임금이 초대하는 잔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한 자리에서 임금은 참석자에게 춤을 추도록 권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참석자들이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일어나 춤을 추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부터 서민을 궁중의 양로연에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신분과 성별에 관계 없이 양로연에 초대하도록 문호를 넓힌 임금은 어진 군주 세종이었다. 1432년(세종 14) 8월 세종은 양로연의 참석 대상을 넓히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연로한 사대부는 참석하는데, 연로한 명부(命婦)는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세종은 지적하였다. 또 양로연이라 이른다면 서민의 남녀들도 모두 참석해야 함을 당부하며, 이러한 사안을 신하들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대해 황희(黃喜, 1363∼1452)는 “부녀로서 연로한 자는 거동하기 어려우므로 대궐 안에 출입하기가 불편할 것 같사오니, 마땅히 술과 고기를 그 집에 내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연로한 명부가 참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세종은 “옛날에는 대궐 안에 말을 타고 온 사람도 있었으니 교자(轎子)를 타고 바로 자리에 들어오게 하고, 여종이 곁에서 부축하여 모시게 하고 중궁(中宮)이 친히 나아가서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의리에 해로울 것이 없겠다. 사대부와 명부와 서민의 남녀에게 연향하는 의주를 의논하여 아뢰라.”라고 지시하였다.159) 『세종실록』 권57, 세종 14년 8월 14일 경자.

승정원에서는 세종의 의견에 반대하여 노인으로서 천한 자는 양 로연에 나오지 말도록 요청하였다. 세종은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극히 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석하게 하라.”라고 하며,160) 『세종실록』 권57, 세종 14년 8월 17일 계묘.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결국 다음 해인 1433년의 양로연에는 처음으로 서민들까지 초대되었으며, 여성이 참여하는 양로연은 중궁의 주도하에 사정전에서 베풀었는데, 사대부의 아내로부터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362인에 이르렀다.161) 『세종실록』 권61, 세종 15년 윤8월 6일 병진.

할아버지가 양로연에서 춤을 춘 기록은 1440년 9월 근정전 양로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자 뜰 아래에서 초대된 노인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162) 『세종실록』 권90, 세종 22년 9월 6일 을사. 할아버지가 초대된 양로연에서 왕이 참석자에게 춤을 권하거나, 아니면 참석자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는 모습은 조선 후기에도 이어졌다. 1773년(영조 49) 3월 영조가 금상문에서 양로연을 행하였을 때, 문무 종신과 사서의 노인으로서 연회에 참석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또한, 사·서민(士庶民)의 노인들이 지팡이를 어깨에 메고 춤을 추며 천세를 부르고 나오니, 천세 소리가 대궐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노인들이 얼마나 신나고 기운이 났으면 지팡이를 짚기는커녕 어깨에 메고 춤을 추었을까. 조금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으나 노인들의 기쁨과 흥으로 인해, 연로하여 몸이 불편한 장애도 극복되는 모습이다. 이날 노인으로 80세 이상인 자는 가자(加資)하고, 103세가 된 사람은 특별히 지충추(知中樞)를 제수하는 등 특별한 포상이 이루어졌다.163) 『영조실록』 권120, 영조 49년 윤3월 3일 임술.

1795년 윤2월에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였을 때, 낙남헌(落南軒)에 거둥하여 양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특히, 이 해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봉수당(奉壽堂)에서 마련하였기 때문에, 더욱 노인을 위한 양로연에 정성을 기울였다. 낙남헌의 양로연에서는 일반 서민 노인 374명을 초대하였다. 이들이 자리로 들어올 때, 정조는 “나도 노인들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다.”라며 비록 서민이라도 노인에게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이때 음식을 하사받은 노인들은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천세를 불렀다.164) 『정조실록』 권42, 정조 19년 윤2월 14일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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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진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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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낙남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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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사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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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로연에서 춤을 춘 할머니에 관한 실록 기사가 주목된다. 왜냐하면 할아버지가 초대된 양로연에서 참연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기사는 많았지만, 할머니가 춤을 추었다는 기사는 드물기 때문이다. 1440년(세종 22) 9월에는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중궁이 주관하여 할머니를 초대한 양로연이 열렸다. 초대된 할머니는 모두 231명에 이르러 사정전을 가득 메울 정도의 대규모 인원이었다. 술자리 가 한창 벌어지자, 늙은 할미 중에 일어나서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165) 『세종실록』 권90, 세종 22년 9월 12일 신해. ‘늙은 할미(老嫗)’라고 하였으니, 이 할머니의 신분은 서민이라고 추정된다. 평소에 전혀 춤을 추지 않았던 할머니라면 아무리 영광스러운 대궐의 잔치 자리라도, 어렵고 낯선 공간에서 흥을 내어 일어나서 춤추기 어려웠을 듯하다. 아마도 이 할머니는 평소에 즐거운 일이 있었을 때도 춤을 추었을 것이며, 젊은 시절부터 춤을 즐겼던 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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