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3. 백성의 춤
  • 양로연에 초대된 노인의 춤
  • 여주·이천·용인의 양로잔치에서 노인들 춤을 추다
조경아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은 궁궐뿐만 아니라 왕이 행행(行幸)하는 길목에서도 이루어졌다. 중종 23년(1528) 10월 15일에는 중종이 친제를 하려고 마음먹은 지 20여 년 만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인 여주 영릉(英陵)에 참배를 갔다. 12일에 궁궐을 떠나 용인에 도착하였고, 13일에는 이천에, 14일에는 여주에 도착해 15일에 친제를 지냈다.

공식적인 일정을 마친 뒤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주었고, 특히 임금이 지나가는 곳은 백성의 폐해가 매우 많다고 하며 여주 등 6고을은 전조(田租)의 반을 감면시켜 주었다. 또한, 6고을 출신을 대상으로 무과와 문과 시험을 보아 지역의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중종의 행차가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는 차례대로 여주-이천-용인의 노인들을 위해 양로연을 베풀었고, 그 자리에서 노인들은 춤으로 영광과 기쁨을 표현하였다.

중종이 친제를 지낸 날인 15일에 바로 여주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여주 목사도 참여하였는데, 정광필(鄭光弼, 1462∼1538)과 심정(沈貞, 1471∼1531)에게 여주의 노인들에게 춤추기를 권하는 것이 어떠한지 의견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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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
영릉(英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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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재변이 있으므로 음악을 쓰지 않아야 하겠으나, 노인들을 위하여 음악을 연주하려 한다. 성종조의 옛일을 보면 노인이 다 일어나 춤추었거니와 지금은 재변이 있으므로 일어나 춤추게 하는 것이 미안하나 노인을 위한 일이고 또 드문 거사이니 궁벽한 촌간의 노인이 다 일어나 춤추게 하여 영행(榮幸)을 보이는 것이 어떠한가?”하니, 정광필과 심정이 아뢰기를, “저 궁벽한 촌간의 노인이 이러한 성사(盛事)를 만났는데 어찌 우연하겠습니까? 재변이 있는 때일 지라도 뭇 신하와 연락(宴樂)하는 것이 아니라 만대에 유전(流傳)할 성사이니, 늙은 사람을 다들 기쁘게 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주서(注書)를 시켜 노인들에게 말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166)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15일 계축.

재변은 전날인 14일에 번개가 친 것을 말한다.167)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14일 임자. 이런 하늘의 변고가 있으면 자숙하여 삼가는 뜻으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주에 임금이 거둥하여 베푸는 양로연은 매우 드문 기회이기 때문에 중종은 융통성을 발휘하여 노인들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게 하여, 기쁨을 한껏 누리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의 양로연에서는 양로연 참석자에게 가자(加資)를 주지만 시골 노인에게 는 때때로 주지 못한다고 하여, 노인 중에 양인에게는 가자를 주고 천인에게는 관목면(官木綿) 2필과 정포(正布) 2필을 주는 자상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168)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15일 계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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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정
애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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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음 날인 10월 16일에는 이천의 애련정(愛蓮亭)에서 양로연을 베풀어 주고 “노인들이 이미 선온(宣醞)을 마셨으니, 여주에서 한 대로 일시에 일어나 춤추고 나가게 하라.”라고 하였고,169)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16일 갑인. 10월 17일에는 용인의 양벽정(漾碧亭)에서 양로연을 베풀어 주고 “노인들이 이미 선온을 마셨으니, 이천의 전례대로 한꺼번에 일어나 춤추게 하라.”라고 하였다.170) 『중종실록』 권63, 중종 23년 10월 17일 을묘.

중중의 권유대로 노인들은 한꺼번에 일어나 춤을 추고 나갔다. 양로연에 참석한 모든 노인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추며 벌이는 대동의 춤판은, 태평시대에 노인들이 오래 산다는 옛글이 실현된 양상이었다. 아마도 이 노인들에게는 임금이 초대한 양로연에서 춤을 춘 사실이 평생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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