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3. 백성의 춤
  • 백성의 음주가무
  • 제사 뒤의 음주가무
조경아

백성들의 음주가무는 실록에서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를 시기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세종 대에는 제사 때의 음주가무가 가장 문제였다. 세종 12년(1430) 5월에 사헌부에서 보고하기를, 금주령은 내렸으나 제사할 때의 술은 금하지 않아서 제사를 핑계로 백성들이 술과 음식을 많이 준비한다고 하였다. 남녀가 모여서 술에 취하고 소비가 많으며, 술에 취해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기까지 해서 매우 방자하니, 신을 제사하는 때라도 집안의 남녀 외에 잡인(雜人)을 금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세조 대에도 제사 때 부녀들이 춤추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세조 4년(1458) 3월의 일이었다.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음사(淫祀)를 금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이 장구와 악기를 앞세워 북치고 춤추기까지 한다는 지적이 조정에서 나왔다.171) 『세조실록』 권7, 세조 3년 3월 29일 임진. 음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복을 빌기 위해 마련한 굿판인 듯하다.

굿판에서 무당이 아닌 부녀자들이 춤을 추었다고 하니, 당시 굿판에서 부녀자의 춤을 추는 것이 드물지 않게 행해졌던 것 같다. 굿판에서는 부녀자들의 춤뿐만 아니라 광대들이 춤과 노래로 엮는 놀이도 이어졌다. 굿판을 주도하였던 부녀자들이 광대까지 섭외해서 판을 벌였던 듯하다. 조정에서는 잘못된 풍습을 좌시할 수 없다며 금주령을 요청하였으나 세조는 백성들을 위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백성들이 겨우 한 번 술에 취하였다고 해서 먼저 허물을 꾸짖고, 호화롭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는데도 도리어 허물을 꾸짖지 않는다면, 이런 법은 시행하여도 이익이 없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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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상김씨세전서화첩』 환아정 양로회도, 김윤
『풍상김씨세전서화첩』 환아정 양로회도, 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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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뭄으로 곧 금주령을 내렸고, 여전히 백성들은 영접하는 잔치나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 혹은 노니는 일로 술에 취해 노래하고 춤추며 편안히 즐긴다는 지적이 나왔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식한 집에서도 모두 이러한 행태를 벌이므로, 금주령을 보다 엄격히 시행하고 음사를 금지하도록 세조 4년 5월에 상소를 올렸다. 이때에도 세조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더욱 성찰하겠다는 대답만 남겼다.172) 『세조실록』 권12, 세조 4년 5월 4일 경인.

명종 대에는 여러 신을 모신 사당에서 남녀의 음주가무가 이루어지는 실상을 문제시하기도 하였다. 명종 21년(1566) 1월에 사헌부에서는 근래에 폐습이 고질화하고 신에 대한 제사가 너무나 많다고 지적하였다. 국사(國祀)뿐만 아니라, 여러 신을 모신 사당도 많이 세워 놓고 남녀가 한데 모여 술 마시고 가무한다는 소문이 서울에 널리 펴졌다고 하였다. 또한, 굿판을 벌여 복을 구하는 일은 무식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세도가에 모두 만연하였으며, 이는 풍습에 대한 교화가 행해지지 않아 유교에 어긋나는 모든 사교(邪敎)가 편승하였기 때 문이라고 사헌부는 진단하였다.173) 『명종실록』 권32, 명종 21년 1월 25일 정사.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조선시대에 집안의 제사나 집밖의 굿판에서 백성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다. 국가나 집안 제사가 아닌 다음에야 신을 모신 사당의 제사는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의 춤판은 지속되었다. 춤을 위주로 보면, 부녀자들끼리 추는 춤판도 있었으며, 남녀가 한데 벌이는 춤판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이 당시에는 풍속이 어지럽게 된 상황으로만 인식되었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들을 통제하려고 해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백성의 춤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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