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4. 기녀와 무동의 춤
  • 기녀와 무동의 연습
조경아

궁중 연향에서 공연을 담당할 기녀와 무동이 선발되면 곧 연습이 시작되었다. 궁중 연향에서 연습과 관련된 용어로 습의(習儀)·이습(肄習)·외습의(外習儀)·내습의(內習儀)·사습의(私習儀) 등이 의궤에 등장한다. 습의는 연향 의식 전반을 익히는 예행 연습으로 오늘날의 리허설 형태였으며, 마지막 습의는 연향 공간에서 모든 차비들이 복식과 기물을 갖추어 이루어졌다. 반면에 이습이라 할 때는 의례 연습을 제외한 정재 등의 개별 연습을 지칭한 뜻으로 쓰였다. 습의 공간에 따라 외습의는 궁궐 밖에서, 내습의는 궁궐 안에서 시행되는 습의이다. 사습의는 공간에 관계 없이 본격적인 습의 이전에 기물을 설치하지 않고 비교적 간략한 형태로 연습하는 형태로 추정된다. 습의일은 연향일과 마찬가지로 일관에게 길일을 택하도록 하였다. 정재를 포함한 의식 전체를 연습하는 습의는 외연(外宴)보다 내연(內宴)에서 더 많이 시행되었고, 마지막 습의는 반드시 연향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정재 연습을 주도한 기관은 장악원이었다. 경축하여 열린 1744년의 진연을 기록한 갑자년 『진연의궤』에는 유일하게 장악원 악사와 악공들이 여령을 이습시킨 내역이 등장한다. 이 잔치를 위해 6도에서 올려온 52명의 기생들은 한 달 정도 연습 시간을 가졌다. 이들 여령의 교습을 맡은 스승은 모두 18명으로 직분은 집사전악·전후집박전악·대오전악·전정집박전악 등이었다. 이들이 가르친 내용은 처용무를 비롯하여 노래 및 장고·방향·현금·교방고 등의 악기 연주였다. 장악원에서 여령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교습은 악장(樂章)이었으며, 주야로 노래 가사를 익히도록 특별히 등유를 지급받았다.181) 영조 갑자년 『진연의궤』 권1.25a9-26a8, 「계사질」 ; 권2. 11b3-11, 1744년 9월 15일 「품목질」. 선상기들이 역(役)을 사는 고을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하였 더라도, 궁중정재와는 형식과 내용이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악장을 익혀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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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계첩』 <기사사연도> 오방처용무
『기사계첩』 <기사사연도> 오방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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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에서 여령들은 연습에만 치중하기 어려웠다. 인조 대에는 장악원에서 배울 때 갑자기 무뢰배들이 쳐들어와 관원을 협박하고 기생을 찾아 밤을 틈타 끌어갔다. 끌어간 기생을 근처 인가에서 구타해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고, 연회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장소에서 곳곳마다 난동을 부렸다.182) 『승정원일기』 원본29책, 탈초본2책, 인조 8년 3월 7일 정해. 재색을 겸비한 각도의 여령들이 장악원에 모였으니, 무뢰배들이 서로 끌어가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특히, 여령을 끌고 가서 거의 죽을 지경으로 때리기까지 하였으니, 정재 공연을 위해 지역에서 올라온 여령들의 신세는 매우 고단하였을 것이다.

공연을 위해 뽑혀 올라온 선상기들을 사적인 목적으로 끌어가는 폐단은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영조는 조정의 관료와 유생이 이에 해당되면, 양사(兩司)에서 논계(論啓)하여 청현직(淸顯職)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무인과 잡인의 경우라면, 모두 곤장으로 엄히 다스리도록 선포하였다.183) 『영조실록』 권112, 영조 45년 2월 2일 을묘. 그러나 임금의 지엄한 분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폐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헌종 대에도 여령이 실습한 지 오 래되었는데도 제반 정재가 전혀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면서 그 까닭은 제대로 감독하지 않아 나태하게 되었고, 사사로이 노는 자리에 여령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처벌하겠다고 엄포하였고, 그 내용을 글로 써서 벽에 붙이도록 지시하였다.184) 헌종 무신년 『진찬의궤』 권1. 4b2-8, 1848년 1월 16일 「전교」,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앞의 책, 권1,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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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도 부분, 신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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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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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진찬의궤』춘앵전 중
『무신진찬의궤』춘앵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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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연습 기간에는 연습용 의상이 별도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한 예로 1848년의 진찬에서 독무 춘앵전(春鶯囀)에 들어간 공연용과 연습용 의상의 내역을 비교하면, 공연용 의상에 실제로 들어간 비용이 102냥 2전 7푼이고, 연습용 의상에는 34냥 9전 8푼이었다. 공연용의 1/3 정도 비용을 들여 연습용 의상을 만든 셈이다. 연습용 의상의 천은 값싼 것으로 하였고, 연습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장식적인 물품들은 생략하였다. 예컨대, 공연용 의상은 대부분 갑사(甲紗)라는 질 좋은 비단을 소재로 의상을 만들었는데, 연습용 의상은 대부분 생초(生綃)라는 값싼 소재로 만들었다. 또한, 연습용으로 꽃비녀나 쪽비녀, 가죽 신발 등을 마련하지 않았다.185) 헌종 무신년 『진찬의궤』 권3. 39a12-40b7 ; 50b11-51b2, 「악기풍물」,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앞의 책, pp.173∼177, pp.211∼214. 순조 대 이후 연습용 의상까지 구비하는 현상은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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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도
화성행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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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화성 행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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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의 기간에는 일정한 급료가 지급되었다. 숙종 45년(1719)의 진연을 준비할 때, 악공 82명에게 습의하는 3일 동안 매일 요미(料米) 각 2되씩을 좁쌀을 섞어서 지급하였고, 무동 10명에게 3일 동안 매일 요미 각 2되씩을 지급하였다. 무동의 급료에는 좁쌀을 섞지 않았으니, 악공보다 더 대우가 좋았던 셈이다. 공연 당일에는 집사전악과 집박전악 6명과 악공·무동 합 92명에게 공궤미(供饋米) 2되씩, 조기 2마리씩, 간장 1홉씩, 새우 5작씩을 지급하였다.186) 숙종 기해년 『진연의궤』 권1. 51b3-7, 「요포상하질」, 송방송·박정련 외, 『국역 숙종조 기해진연의궤』, p.163.

영조 20년(1744)의 진연 때에 6도에서 올라온 선상기 52명에게는 도착하여 신고하는 날부터 매일 점심쌀이 1되씩 지급되었고, 무동에게는 세 번째 습의와 공연 당일에만 요미가 지급되었다. 대신에 무동과 공인 106명에게는 외연의 세 번째 습의 및 정일에 요미 2되씩을 주고, 반찬도 일방(一房)의 품목대로 주었다. 지급 방식은 먹거리 지급증서에 따랐으며, 그 품목은 쌀 2되씩, 조기 2마리씩, 간장 1홉씩, 간고기 5작씩으로,187) 영조 갑자년 『진연의궤』 권1. 38b1-40a1, 「미포상하식」, 송방송·고방자 외, 『국역 영조조갑자진연의궤』, pp.83-85 ; 권2. 30a12. 1744년(영조 20) 9월 15일 「품목질」, 송방송·고방자 외, 앞의 책, p.138. 1765년의 수작(受爵) 때와 지급 내용이 동일하다.188) 영조 을유년 『수작의궤』 권2. 22a7-11. 1719년 진연과 비교해 볼 때, 새우가 간고기로 바뀐 것만 다르다.

정조 19년(1795)의 진찬 습의 때, 경기(京妓)의 점심쌀은 정리소 에서 내려주었고, 화성 향기의 점심쌀은 수원부에서 매일 1명당 쌀 한 되씩을 내려주었다. 1795년 진찬은 화성에서 공연하였기 때문에 정리소에서 특별히 노자를 마련해 주었다. 장악원은 모두 1,796냥 4전을 받았다. 전악 4인에게 14일치 각 4냥 2전, 말 4마리를 빌릴 돈으로 각 8냥, 각색 예졸 18명에게 14일치 각 4냥 2전, 양로연 등가차비(登歌差備) 6인에게 각 17냥을 주었다. 경기 도기 2명에게는 각 60냥을 주었고, 그 밖의 경기 14명에게는 각각 50냥을 주었다. 화성향기 15명에게는 각 50냥씩을 지급하였다.189) 정조 을묘년 『정리의궤』 권3. 43b10-44a1, 1795년 2월 12일 「이문」, 수원시, 『역주 원행을묘정리의궤』, p.284 ; 권4. 51a2-3. 「반전」, p.456. 이 당시 정재여령에게 노자를 마련해 지급한 일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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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능행도병』 중 제1첩
『화성능행도병』 중 제1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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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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