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4. 기녀와 무동의 춤
  • 기녀와 무동의 정재 공연
  • 1. 1829년, 평양 기녀의 정재 공연
조경아

기녀의 정재 공연을 순조의 사순(四旬)과 등극 30주년을 경축하여 열린 순조 29년(1829) 자경전 진찬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2월에 열린 잔치를 위해 기녀는 평안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6도 27지역에서 선발되었다. 2월 12일의 내진찬(內進饌)에서 여령은 모두 13종의 정재를 공연하였는데, 그 종목은 몽금척지무·장생보연지무·헌선도·향발무·아박무·포구락·수연장지무·하황은·무고·연화대·검기대·선유락·오양선이었다.190)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 권1. 28a4-40a8, 『한국음악학자료총서』 권3, pp.165∼171.

정재 공연을 위해 선상된 평양 출신 기녀에 대하여 최근 평양기생 66명의 이야기가 실린 한재락(韓在洛)의191) 한재락은 자는 鼎元, 호는 藕泉·藕舫·藕花老人이다. 개성 사람으로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아버지 韓錫祜(1750∼1808)는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두 형 중에 둘째 형은 『高麗古都徵』을 쓴 韓在濂(1775∼1818)이다. 아버지와 바로 위의 둘째 형 한재렴의 생몰연대로 한재락의 태어난 해를 추정해 보면 대략 1776-1785년 사이였을 것 같다. 『녹파잡기(綠派雜記)』가 소 개되었다.192) 안대회, 「평양기생의 인생을 묘사한 소품서 녹파잡기 연구」,『한문학보』14, 2006, pp.273∼308에서 처음으로 『녹파잡기』를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녹파잡기』는 19세기 전기에 한재락이 저술한 소품으로 개성 명문가 출신의 실의한 문사가 그가 직접 보고 겪은 평양의 이름난 기생을 묘사한 문학서라고 한다. 한재락은 불행한 태생의 기생들이 보여주는 천박하고 화려한 외부를 걷어내고 그 이면에 도사린 슬픔과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아름다운 산문으로 엮어냈으며, 평양의 기생을 정확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한 저술은 없기 때문에 기생 연구에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이에 의하면 총, 66명 중 현옥(玄玉)·차옥(車玉)·춘심(春心)은 1829년 2월 12일과 13일에 열린 잔치에서 정재 공연을 한 기녀로 추정된다. 『녹파잡기』의 기록과 순조 대 기축년의 『진찬의궤』의 기록을 종합하면 평양에서 올라와 정재 공연을 담당하였던 3여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다 부각시킬 수 있다.

먼저 선유락 정재에 출연한 현옥의 이야기이다.

현옥(玄玉)은 눈매가 환하고 눈동자가 반짝인다. 여러 잡기를 두루 섭렵하였고 노래도 정묘하게 터득하였으며, 자태가 민첩하고 성품이 온화하다. 술손님 가운데 난류(亂流)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자리를 뺏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부드럽게 화해시켰다. 그리고 부자든 초라한 사람이든 한결같이 친하게 사귀어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내가 전에 평양에 갔더니 성안의 젊은이를 만날 때마다 어김 없이 현옥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성도(聖都), 성천(成川)에 가는 바람에 한 번도 보지 못해 애석하게 여겼다. 5년 후 나는 다시 이곳에 놀러 왔는데, 대동강 배 안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다. 그때 선창에 있던 여러 기녀들이 곱게 단장하고 애교스런 눈빛을 하며 아름다움을 다투었는데, 현옥만이 대충 연하게 눈썹만 그린 채 단정하게 물러나 앉아 있었다. 나는 대번에 그녀가 현옥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뒤에 피리와 가야금 연주가 시작되자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나왔다. 붉고 또렷한 입술에서 맑고 구슬픈 곡조가 흘러나와 높은 음향이 울려 퍼지니, 정곡(郢曲)이 한번 연주되자 화창(和昌)하는 사람이 없었다던 바로 그 경우였다. 이날의 즐거운 잔치는 저물녘이 되어서야 끝났다.

이튿날 나는 삼십육천동(三十六天洞)에 들어가서 열흘 있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시 잘 짓는 친구 두세 명과 그녀의 집인 오성관(五城觀)을 방문하였다. 현옥은 서둘러 소나무 뜰을 청소하라 이르더니, 석류꽃 아래 삿자리를 깔고 가야금을 가져와 <유수곡>을 연주하였다. 곡이 끝나자 술잔을 몇 순배 돌 리며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다. 현옥이 먼저 “훌륭한 선비들께서 오신 뜻은 시들어가는 꽃이 안쓰러워라네(群賢來意屬晩花)”라고 한 구절을 읊었다. 그녀의 고운 솜씨가 뛰어나게 드러나는 것은 비단 노래를 부를 때만이 아니다.193) 이가원·허경진 옮김, 한재락 지음, 『녹파잡기: 개성 한량이 만난 평양 기생 66인의 풍류와 사랑』 김영사, 2007, pp.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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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의 자경전 진찬도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의 자경전 진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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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파잡기』에 기록된 현옥은 자의식이 강하였다. 외모를 치장하는데 골몰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노래로서 나서야 할 자리에서는 아무도 짝하여 함께 노래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한껏 선보였다. 현옥은 1829년 2월 자경전에서 열린 진찬에서 후창악장을 불렀고, 선유락 정재에서 배를 끄는 예선(曳船)의 역할을 맡았다.194)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 권3. 6a9-7a12 「공령」. 후창악장은 두 명이 담당하였는데, 공연에 참여한 여령 중에 노래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 맡았다. 현옥이 선창악장을 맡았다는 점 은 노래 실력이 뛰어났다는 『녹파잡기』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두 번째 인물인 차옥은 『녹파잡기』에서 용모가 깨끗하고 늘씬해서 궁중 정재를 공연하기에 손색 없는 미모였으며, 청아한 음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졌다. 차옥은 젊은 시절 한양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세월이 흘러 다시 노류장화인 기생 노릇을 하는 자신을 자조 섞인 어투로 한탄하고 있다. 차옥은 1829년 2월에 열린 진찬에서 두 종목의 정재에서 참여하였는데,195)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 권3. 6a9-7a12 「공령」. 수연장 정재에서 우무의 역할을 하였고, 선유락 정재에서 무의 역할을 맡았다.

세 번째 인물인 춘심은 『녹파잡기』에서 “춘심은 분칠한 뺨이 곱디곱고 하얀 이가 환하다. 정을 담아 돌아보며 웃는 웃음에 고운 맵시가 넘쳐난다.”라고196) 『녹파잡기』, p.124(원문은 p.179), “春心 粉腮盈盈 晧齒朗然 含意顧笑 綽有韶致.” 간단히 소개되었다. 춘심에 대해서는 고운 외모만 부각시켰고, 세 인물 중에 가장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가 공연한 정재 종목은 셋 중에 가장 많았다. 춘심은 1829년 2월에 열린 진찬에서 여섯 종목의 정재에 출연하였다.197)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 권3. 6a9-7a12 「공령」. 포구락 정재에서 우무를 맡았고, 무고에서 협무를, 연화대 정재에서 좌협무를, 선유락에서 외무, 가인전목단에서 좌무를, 처용무에서 협무를 맡았다.

3명의 평양 출신 여령들이 정재 공연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평양 교방에서 활동하였던 기녀였다. 평양교방에서 18·19세기에 성행하였던 정재는 포구락·무고·처용·향발·발도가·아박·무동·연화대·학무·검무·헌선도·사자무 등 12가지였다.198) 김은자, 「조선 후기 평양교방의 규모와 공연활동」, 『한국음악사학보』 31, p.229. 도상 자료를 통해서도 평양 교방의 정재 공연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피바디 에섹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8세기 후반의 『평양감사환영도』 제2폭의 <도임환영> 부분에는 무고·학무·연화대 정재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9세기의 『평양감사환영도』 <부벽루연회도>에 처용무·포구락·검무·무고와 <연광정연희도>에는 사자무·학무·연화대·선유락 등이 나 타났다. 평양 관아의 정재는 궁중 정재에 비해서 출연 인원도 적고, 의상도 소박하며, 무대 도구의 규모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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