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3 조선시대 사람들의 춤
  • 04. 기녀와 무동의 춤
  • 기녀와 무동의 정재 공연
  • 1828년, 무동의 정재 공연
조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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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포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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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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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연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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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연향으로 군신이 주축이 되는 외연에서는 무동, 왕실 가족과 여성인 명부를 비롯하여 왕실의 친인척이 참여하는 내연에서는 여령이 정재를 공연하였다. 그런데 순조비 순원왕후의 사순을 경축하여 열린 순조 28년(1828)의 진작에서는 이례적으로 내연과 외연을 모두 무동이 담당하였다. 1828년에 네 차례에 걸친 잔치는 순조 무자년 『진작의궤』에 자세히 전한다.199) 순조 무자년 『진작의궤』 권1. 11b4-27a2 ; 부편 5a6-7a11.

순조 28년 6월 1일의 연경당 진작은 새로 창작된 정재가 대거 선보였다는 점과, 무동의 출연 횟수가 역대 연향 중 가장 많았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6명의 무동이 19종목의 새로 창작된 정재는 물론이고, 전승된 정재까지 합쳐 총 23종목의 정재 종목을 모두 소화해 냈다. 진작의 의식 절차에 따라 17종목의 정재가 연행되었다. 그러나 정재도·정재악장·공령의 기록에서는200) 순조 무자년 『진작의궤』 권수 37a-48a ; 부편 1b6-5a4 ; 부편 19a9-20a2. 17종목의 정재 외에도 고구려무·공막무·무고·향발·아박·포구락의 6종이 더 포함되어 있어, 모두 23 종목의 정재가 기록되었다. 따라서 진작 때 연행된 정재가 17종목인지, 23 종목인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의주 기록에 누락되어 있는 6종목의 정재도 이 시기에 존재 하였다.201) 연경당 진작에 나타난 23종목의 정재 중에서 무고·아박·포구락·향발을 제외한 19종목의 정재가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하는 정재이다. 따라서 『무자진작의궤』의 「부편」 기록은 정재사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종목을 나열하면, 가인전목단무·경풍도무·고구려무·공막무·만수무·망선문무·무산향무·박접무·보상무·연화무·영지무·첩승무·춘광호무·춘대옥촉무·춘앵전무·최화무·침향춘무·헌천화무·향령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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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선유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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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가인전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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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처용무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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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 6명과 악공 4명이 연경당 진작에서 정재를 맡았다. 무동 6명의 정재 출현 빈도를 살펴보면, 김형식이 22종목으로 가장 많이 출연하였고, 진대길은 20종목에 출연하였으며, 신광협과 진계업은 각각 17종목에 출연하였고, 김명풍은 16종목에, 신삼손은 15종목에 출연하였다. 6명의 무동은 모두 2월의 진작에서도 공연하였는데, 그때는 각자 출연한 정재 종목이 4종목 이하였다. 6월의 진작에서 정재 공연의 최다 출연자인 김형식은 단 한 종목을 제외한 22종목의 정재에 출연하였기 때문에, 거의 연속으로 출연해야 하는 힘든 일정을 소화해야 하였다. 독무 정재인 무산향과 춘앵전도 그가 담당한 것을 보면, 김형식은 6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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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환영도』 제2폭 「도임환영」 부분, 18세기 후반
『평양감사환영도』 제2폭 「도임환영」 부분, 18세기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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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환영도』 「부벽로연회도」 부분, 19세기
『평양감사환영도』 「부벽로연회도」 부분,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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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감사환영도』 「연광정연희도」 부분, 19세기
『평양감사환영도』 「연광정연희도」 부분,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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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 4명의 활동을 살펴보면, 무고정재에서 봉고 역할을 맡은 김원식과 안득준, 그리고 포구락 정재에서 봉구문의 역할을 맡은 서학범과 차종복은 무대 도구를 무대 위에 놓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정재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던 이들 4명은 악공이었다. 봉고의 안득준과 봉구문의 차종복은 필률차비였고, 봉고의 김원식은 대금차비, 봉구문의 서학범은 방향차비였다.202) 순조 무자년 『진작의궤』 부편 19a3-20a2. 이처럼 외연의 정재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악공도 참여하였다.

연경당 진작은 정재의 실험 공간이었다. 어떻게 19종목의 새로운 정재를 한꺼번에 선보일 수 있었을까?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연향을 진두 지휘하였던 효명세자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를 가능하게 하였던 조건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시간적(天) 조건이 공식성이 적은 6월 1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순원왕후의 사순을 경축한 진작을 이미 2월 달에 공식적으로 치렀고, 생신(5월 15일)을 즈음한 시기에 소규모로 다시 연향을 치렀기 때문에 비교적 공식성이 덜하였다. 그런 시간적 배경은 새로운 실험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둘째는 공간적(地) 조건이 공식성이 덜한 연경당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에 실험이 가능하였다. 연경당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임명한 뒤에 물러나 조용히 살던 공간이었다. 따라서 연경당에서의 진작은 어버이에 대한 효성을 더욱 드러낼 수 있는 장소이면서 한편으로는 법전이나 편전 같은 정치적인 공간과도 차이가 있었다. 즉, 연경당은 공간적인 공식성이 적었기 때문에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셋째는 인간적(人) 조건이 적은 규모로 진행되었으므로 실험이 가능하였다. 즉, 진작에 초대된 인원도 적었고 출연한 무동 수가 적었으므로, 적극적인 실험을 시도할 수 있었다. 무동 6명이 23종목의 정재를 공연하였다. 정재 실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적은 수의 무동이라야 새로 창작한 정재를 손쉽게 학습하게 하고 공연을 시킬 수 있었다. 단일 정재 종목 안에서도 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여 죽간 자도 등장시키지 않고, 핵심적인 역할만으로 최소화하였다. 그런 작은 규모의 정재 실험단을 마련하여 효명세자는 자신이 직접 정재악장을 쓴 열한 종목의203) 무자년과 기축년 효명세자의 예제 정재에 대해서는 조경아, 「순조대 효명세자 예제 정재: ‘예제’의 범주 및 정재 창작시기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국무용사학회 논문집』 1, 2003, pp.17∼36 참조. 정재를 포함한 19종목의 정재 실험을 진두 지휘하였다고 본다.

<표> 1828년 진작의 정재무동 공연 순서
(✽)는 의주에 없으나, 도식과 악장에 있는 정재
  2.12.묘시/무동 대전. 중궁전 진작 2.12.2경/무동 야진별반과 2.13.진시/무동 왕세자회작 6.1진시/무동 대전. 중궁전 진작
1 광수무 초무 무고 망선문
2 광수무 초무 아박무 경풍도
3 아박무 아박무 포구락 만수무
4 아박무 향발무 향발무 헌천화
5 향발무 첨수무 첨수무 춘대옥촉
6 향발무 수연장 포구락 보상무
7 수연장 포구락 광수무 향령무
8 수연장 무고 무고 영지무
9 첨수무 광수무 첨수무 박접무
10 첨수무 첨수무 처용무 침향춘
11 무고 포구락   연화무
12 무고 광수무   춘앵전
13 포구락 아박무   춘광호
14 초무(✽) 향발무   첩숭무
15 처용무 수연장   최화무
16 처용무 초무   가인전목단
17   광수무   무산향
18   처용무   고구려무(✽)
19   처용무   공막무(✽)
20       무고(✽)
21       향발(✽)
22       아박(✽)
23       포구락(✽)

세 가지 조건의 공통점은 공식성이 적다는 점과 작은 규모였다는 점이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실험은 여러 가지 틀이 단단하지 않은 조건에서 더 잘할 수 있다. 비공식적인 곳, 자유로운 곳, 소규 모에서 창의적인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의 예술 조건과도 통하는 지점이다.

<표> 1828년 6월 1일(연경당) 대전·중궁전 진작의 무동별 정재 공연
    정재

무동


















































1 김명풍 작선 집당 집당               16
2 김형식 집당 집당   22
3 신광협 작선 집당 집당 집당             17
4 신삼손 작선 봉경
풍도
봉선
도반
  집당               15
5 진계업 작선 봉화병 집당             17
6 진대길 집당 집당       20
7 김원식                                       봉고       1
8 안득준                                       봉고       1
9 서학범                                           봉구문   1
10 차종복                                           봉구문   1
  합계 6 6 6 5 6 6 2 6 6 2 6 1 6 6 6 4 1 6 2 6 2 8 6  

지금까지 조선시대 왕·선비·백성·기녀와 무동이 추었던 춤을 살펴보았다. 전문인인 기녀와 무동은 직업으로 춤을 추었지만,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였던 조선시대에 비전문인도 또한 춤추며 살아가고 있었다. 고려의 잔영이 영향을 미치던 조선 전기에는 왕과 선비가 어울려 춤추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성리학적 정치이념이 뿌리를 내리면서 보다 경직된 사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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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연경당
창덕궁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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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무자년 『진작의궤』연경당도
순조 무자년 『진작의궤』연경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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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포괄한 악의 근원적인 기능은 화합이다. 그러므로 화합해야 하는 대상인 왕, 혹은 어버이 앞에서 춤추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화합하지 않아야 하는 대상 앞에서 춤을 춘 것은 아부나 일탈로 보았다. 춤은 즐거움이 가장 극대화된 표현으로 조선시대의 기록을 통해서 이러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선비·백성은 흘러넘치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다른 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춤을 추었다. 즐거운 시기에 춤을 춘 것은 용인되었으나, 재변이나 흉년 등 즐겁지 않은 시기에 춤을 추는 것은 통제하려고 하였고, 그 판단은 중앙 정부에서 하였다. 조선 말기까지 춤을 통제하려는 기록이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니, 역설적으로 통제하려고 해도 통제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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