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4 전환기의 삶과 음악
  • 01. 근대로의 진입과 전통 음악의 대응
  • 축음기의 유입과 레코드음악
이소영

1877년 에디슨이 소리를 녹음해서 재생하는 축음기(유성기)를 발명한 이후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음악 감상과 향유 방식은 일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축음기의 발명으로 인하여 음악의 기록과 재생이 가능해짐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는 음악 향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분적 차이와 공간의 제약 속에 향유되던 전통음악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개념으로 출현한 대중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창작의 시작 단계에서부터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축음기 녹음을 염두에 둔 대중가요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국인 녹음이 담겨있는 최초의 음반을 이야기 할 때는 인류학적인 기록으로 음반과 상업적인 상품 가치를 갖는 음반으로 나뉘어 언급될 수 있다. 인류학적인 기록 차원에서 한국인의 육성이 처음 취입된 해는 1896년이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간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상대로 문화인류학적 차원에서 민속조사를 하던 여성 인류학자 앨리스 C. 플래처(Alice C. Fletcher, 1838∼1923)가 인디언들의 노래와 함께 동요풍 <달아달아>, <아리랑>, <매화타령> 등 한국인 가창자의 노래를 에디슨식의 원통형 레코드에 취입한 것이다.207) 정창관 기획 제작, 『정창관 국악녹음집』 10: 1896년 7월 24일 한민족 최초의 음원 참조. 이 음반은 전문 음악가의 소리는 아니지만 19세기 말 우리 민중의 생생한 노래와 육성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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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최초 음원 복각 CD 자켓
한민족 최초 음원 복각 CD 자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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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문음악가 중에서 유성기 음반을 처음으로 취입한 사람은 경기 명창 박춘재이다. 그는 1895년 6월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참여하여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빅타 레코드에서 녹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8) 송혜진, 앞의 책, p.312. 국내에서 유성기 음반 취입이 시도된 초기에 박춘재는 고종 황제 앞에서 녹음 시연을 보이기도 하였다. 빅타 회사가 궁궐 내에 원통식 녹음기를 설치하고 박춘재로 하여금 나팔 통에 입을 대고 녹음을 하게 하였다. 원통식 납관에서 박춘재의 소리가 흘러나오자 고종이 깜짝 놀라며 “춘재야, 어서 나오너라 네 수명이 10년은 감하였겠구나.”라는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게 바로 ‘10년 감수(十年減壽)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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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의회도서관에 보관된 한국인 최초 음원(원통형 음반) 상자
미 의회도서관에 보관된 한국인 최초 음원(원통형 음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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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상업적으로 발매된 최초의 원반형 유성기 음반은 1907년 미국 콜럼비아사가 발매한 쪽판이다. 그것은 한국 음악가들이 일본 오사카에 가서 녹음한 원반을 미국 콜럼비아 본사에서 음반으로 제작한 후 다시 한국으로 들여와 판매된 것이다.209) 배연형, 「한국 유성기음반 총목록 해제」,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민속원, 1998, p.12 참조. 이때 발매된 한국 음반은 경기 명창 한인호(韓寅五)와 관기(官妓) 최홍매(崔紅梅)의 민요·가사·시조 등 경기소리를 중심으로 한 전통 성악이었다. 당시에는 음반이 거의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팔렸기 때문에 그때 취입된 음악은 주로 서울에서 인기가 있었던 경기민요였다.

미국 음반회사들은 유성기 음반 및 음반 시장 개척을 위해 녹음기재와 기술진을 배에 싣고 세계 각국을 순방하며 현지의 민속음악을 녹음한 이후 본사에서 음반 제작과 판매를 담당하였는데 우리의 경우도 이러한 음반회사들의 시장개척에 편입되어 20세기 초반의 소리들을 음반에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190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진출한 미국 음반회사(미국 콜럼비아사와 미국 빅타)들은 일본에서 녹음하고 미국에서 음반을 생산하여 한국에 수출해야 하는 번거로 움 때문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소수의 한국음악 음반만을 제작하다가 얼마 못가서 한국 음반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미국 음반회사들이 입은 일시적인 적자는 길게 봤을 때 결코 손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미국 음반회사들이 이처럼 세계 곳곳에 뿌려놓은 음반 문화의 씨앗은 훗날 미국식 대중음악이 전 세계를 장악하는 데 큰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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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빅타음반회사 음반
미국 빅타음반회사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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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레코드음악은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직후 일본 음반회사인 일본축음기상회(이하 일축)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 음반회사는 미국 음반회사보다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 강제합병으로 여러 가지 조건이 유리하였다. 일본축음기상회는 이런 여건을 충분히 살렸고 식민지 조선을 점차 황금의 음반시장으로 바꿔 나갔다.

일축은 1911년부터 1928년 미국 콜럼비아와 합작하여 일본 콜럼비아로 개칭되기까지 약 500종의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이 시기에 취입한 음악은 주로 전통음악이었다. 당시 조선의 음반 구매자들이 전래음악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상업적인 이유에서 보면 전통음악의 취입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외에도 일제 때 우리나라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거의 대부분 일본 음반회사였다. 그 대표적인 회사가 앞서 언급한 일본축음기상회와 일동축음기 주식회사였고, 1920년대 후반을 지나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일본 콜럼비아, 일본 빅타, 폴리돌, 오케, 태평, 시에론 등 6개 회사가 경쟁체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순수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 자본의 회사로는 뉴코리아 레코드 외에 몇 개의 군소회사가 있었으나 일본 회사들과의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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