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4 전환기의 삶과 음악
  • 03. 식민지 근대의 대중문화
  • 모던 걸과 모던 보이의 대중문화 수용
이소영

192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축음기와 음반은 좀더 대중화되 어 조선의 공적, 사적 영역에 일상적인 기호품으로 자리잡고, 대중문화의 꽃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비판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축음기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것이 상징하는 어떤 문화와 의식에 대한 반감이었다.

1930년대로 넘어서면서 조선의 도시문화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유성기 음반은 문화적 교양인의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식민지 근대인의 일그러진 표상으로서의 ‘모던 걸·모던 보이’들의 소비문화를 주도하는 매체로 떠오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뾰족구두를 신고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는 ‘모던 걸’과 중절모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모던 보이’는 대중문화의 강제된 욕망을 소비하는 측면이 강조된 신조어였다. 그러나 당시 여성 해방, 남녀 평등과 같은 근대적·서구적 가치관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녀학생’, 즉 인텔리 신여성 및 지식인과의 실제적인 구별이 모호한 면도 없지 않았다.

유성기와 유성기가 만들어내는 유행가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모던 걸’·‘모던 보이’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근대 문화에서도 소비도시 경성이라는 공간 속에 있었다. 그들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구 자본주의 문화가 낳은 새로운 도시문명과 소비문화를 즐기는 새로운 인간군들로 표상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비문화의 주체로 떠오른 ‘모던 걸·모던 보이’들이 눈으로는 당시 일본 및 서구 문화를 동경하면서도 두 발은 찢어진 문과 오두막을 딛고 있는 식민지인의 비참한 현실 속에 서있어야 하는 분열적 모습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조선의 대중문화가 보여주는 식민지적 근대성을 좀더 비판적으로 통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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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이 오면」
「1931년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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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선전시대가 오면」
「여성 선전시대가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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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근대화란 새로운 수요 창출의 의미가 강하였다. 일제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고 백화점을 세우고 박람회를 열었던 것은 조선의 발전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일본 제국의 시장 확대 곧 새로운 수요 창출을 의미하였다. 일본 음반회사들이 경성에 지점을 만들고 조선 음반을 생산하기 위해 전통음악과 민요를 발굴하고 조선인의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유행가와 대중가요 장르를 개척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축음기와 유성기 음반이 새로운 근대인의 문화적 상징으로 떠오르게 되고 문화적 욕망을 자극하여 그 욕망 충족을 위해 직접 소비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영화, 스포츠, 양장 패션, 자유 연애 등이 식민지 근대인 혹은 신식인간의 문화적 패션을 매개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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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유성기음반함
20세기 초 유성기음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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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중문화의 소비가 왜 당시 매끄럽지 못하게 비쳐졌을까?

조선 서울에 안저서 동경행진곡을 부르고 유부녀로서 <기미고히시>를 부르고 다 스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몽파리’를 부르는 것이 요사히 ‘모던 -걸’들이 다 이리하야, 그네들이 둘만 모혀도 밤중 삼경 오경에 세상이 떠나가도록 쇠되인 목청으로 그러한 잡소리를 높이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여성 푸로파간다 - 시대가 오면’ 지붕 위에 집을 짓고 그 지붕과 담벼락을 뚫고 확성기를 장치하고서 떠들어댈 것 같다(‘여성 선전시대가 오면’ 『조선일보』 1930년 1월 19일자).

요사히 웬만한 집이면 유성긔를 노치 않흔 집이 없스니 저녁때만 지나면 집집에서 유성긔 소리에 맞추어 남녀 오유의 <기미고히시>라는 노래의 합창이 일어난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부모처자 모다 <기미고히시->라니 여긔에는 오륜삼강을 찾이 안해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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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기미고히시」
「집집마다 기미고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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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꼴 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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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과 만화에서 알 수 있듯이 모던걸들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도 <몽파리>를 노래부르고 조선의 서울에서 <동경행진곡>을 불러대며 유부녀가 되어서도 젊은 연인의 노래인 <기미고히시>를 부르고 있다. 배고파 쓰러질 지경이어도 비싼 유성기를 사들 여 놓고 일본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는 것이 1920년대 말 30년대 초 경성의 모습이었다.

유성기는 일본 음악 외에 댄스·블루스·재즈와 ‘서양춤’ 역시 경성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는데 일조하였다. 당시 댄스는 댄스홀이 허가가 나지 않아 주로 카페에서 추었지만 유성기가 보급되면서 ‘요리집에서 버선발로 블루스를 추고’, 가정에 까지 번져 돈이 없어 도배도 못한 사람들이 ‘값비싼 축음긔를 사다높고 비단 양말을 헷트리면서’ 춤을 추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앞의 「이꼴 저꼴」의 만화에는 방문, 벽뿐만 아니라 장판 창호문까지 모두 떨어지거나 찢어져 있는데 축음기만이 유일하게 그들의 춤과 어울리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렇듯 유성기와 유성기를 통해 소비되는 유행가, 댄스, 재즈 등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모던 걸· 모던 보이들에게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으로 표상되는 전근대적, 봉건적 구태와 <동경행진곡>과 <기미고히시>로 표상되는 식민지 근대가 결합한, 착종된 모순 그 자체이면서 그 모순적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심리적·문화적 도피처였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의 대중문화 소비는 서구문화에 대한 허구적 욕망과 이와 동떨어진 비참한 생활현실이라는 이중적 모습속에서 이루어졌고 결국 허약한 현실도피와 무기력한 순응으로 귀결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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