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4 전환기의 삶과 음악
  • 04. 대중가요의 시작과 장르 전개
  • 통속 민요의 혼종화
이소영

1930년대는 일본의 음반 회사가 경성에 지점이나 영업소를 설치하여 ‘육대회사(六大會社) 레코드전(戰)’의 형세를 띠게 될 만큼 음반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이에 따라 전통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상품 소비의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시기이다. 여기서 대중음악이라 함은 기존의 전통음악이나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는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생산된 음악을 말한다. 전통음악이나 서양 음악이 현장에서 연주되는 것들을 결과적으로 음반에 담은 것이다. 그에 반해 대중음악은 처음부터 음반이란 형태로 대중들에게 팔릴 것을 의도로 하여 공장에서 규격화된 물건을 생산하는 방식과 흡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음악상품이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전통음악이나 서양의 예술음악의 경우 작곡자나 연주가 등 실제 음악 생산을 담당하는 아티스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지만 대중가요를 만드는 데는 음반사의 문예부와 문예부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진다. 문예부는 가수 인선, 작곡, 작사 선정, 문예부 주관의 편곡, 악단 반주팀 관리, 가수 연습, 녹음시 음악감독, 취입 후 매월신보 발행, 총독부 당국의 검열에 대한 대응과 자체 검열 등 작곡·작사, 노래연습, 녹음과 이후 홍보에 이르기까지 음반 취입에 관한 전 과정을 관리하고 각 분업화된 영역을 조종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당시 각 음반회사의 경성영업소에는 조선인 문화 엘리트로 구성된 문예부장을 필두로 전속 작곡가와 작사자, 전속 가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종의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대중가수들에게 ‘레코드 가수’라는 신조어가 붙여지면서 이전의 ‘스테이지 가수’(무대에서 실연을 위주로 하는 가수)와 구별되었다.

당시 레코드가수들이 불렀던 대중가요를 살펴보면 크게 ‘유행가’, ‘신민요’, ‘재즈송’, ‘만요’ 등으로 대별된다. 그런데 재즈송과 만요가 음반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그렇게 크지 않았다. “레코드를 통해서 아직 조선에서 일반에게 알려지는 노래의 종류로 말하면 유행가, 민요(이것은 순조선 전래의 그 지방지방의 소리), 또 유행가도 아니고 민요도 아닌 비빔밥격인 신민요”라는 언급이나225) 이하윤, 「조선사람 심금을 울리는 노래」, 『삼천리』 1936년 2월호, p.122. “요사이 와서 가장 만히 유행되는 노래들로 말씀한다면 신민요 유행가 민요 등 이러한 순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라는 언급에서226) 민효식, 「새로이 유행될 짜즈-반」, 『삼천리』 1936년 2월호, p.128. 알 수 있듯이 실제로 1930년대 중반 가장 음반에서 많이 팔린 장르는 유행가, 신민요와 (전통)민요 이렇게 3가지였다.

1930년대에 대중가요의 하부 장르로 새롭게 대두된 유행가와 신민요는 그렇다 치고 전래민요가 1930년대 중반까지도 가장 음반으로 많이 팔린 3대 장르 안에 들어있다는 현상을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요는 당시 음반으로 팔릴 것을 목적으로 만든 대중가요가 아니었기에 유행가와 신민요에 못지않은 인기를 동반하였다는 사실은 회갑잔치에서도 듣기 힘들 만큼 민요가 낯설어진 지금 상황에서 보면 다소 의아스러운 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민요가 1920년대와 1930년대 중반까지 음반으로 소비되는 주류 장르였다는 것을 음식문화에 비유해 보면 이해가 쉽다.

요즘 들어 한국인의 입맛이 많이 서구화되어 쌀의 소비량이 줄고 아이들이 햄버거나 피자를 즐겨먹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한국사람의 ‘입맛’이 아직까지 밥과 김치에 익숙한 것처럼 1930년대까지 한국인의 보편적인 ‘귀맛’에는 전통민요가 여전히 익숙한 음악 언어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민요가 대중음악의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는 과정에서 음반 상품으로서 자기 변신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자생적 대중가요 전개론’에 가장 무게를 실어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요는 본래 마을 공동체를 중심으로 노동과 삶의 현장에서 불려진 노래였으나 도시 대중들이 음반을 통해 감상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대중가요화하기 위한 스스로의 자기 변신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대중음반 산업의 성장에 영향을 받은 가장 큰 음악 환경의 변화로는 일본 대중음악과 서양 음악이 지배적인 음악 언어로 대두되면서 전통음악은 ‘구악(舊樂)’으로 주변화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음악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통음악의 생존 전략으로 마련된 것 중 하나가 바로 민요에 양악적 요소를 가미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편곡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선양합주(鮮洋合奏)’란 반주 편성 위에 불려졌던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양악기 몇 개가 화성과 리듬 그리고 전체 사운드를 채우고 선율을 담당하는 국악기와 장단을 담당하는 장구같은 전통 타악기가 가미된 악단이다. 해방 이후에는 한양합주(韓洋合奏)라 불려져 존속되었고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는 퓨전국악밴드가 이러한 방식을 계승하고 있다.

<표> 여러 종류의 <방아타령>
제목 장르명 연주자 시기 음반사 및 번호 연주형태 비고
① 방아타령 서도잡가 이중선·표연윌 1930 빅타 49083 장고, 거문고  
② 방아타령 잡가 이진봉·김옥엽 1930 콜럼비아 40104    
③ 방아타령 민요합창 이화여자전문합창단 1929 콜럼비아 40014 합창과 피아노 안기영 편곡 및지휘
⑤ 신방아타령 민요/잡가 박부용 1933 오케 1571 오케선양교향악단과 독창 오케문예부보사편곡
⑥ 방아타령 서도가요 김란홍 1938 빅타 KJ 1267 빅타일본관현악단과 독창  
⑦ 방아타령 영화설명 강석연 1930 빅타 49099 관현악반주+해설+노래 김동환 작사, 안기영 작곡
⑧ 신방아타령 신민요 왕수복 1933 콜럼비아 40449 콜럼비아관현악단 박용수 작곡

위 표는 당시 많이 취입되고 불려졌던 민요 <방아타령>이 여러 가지 형태로 녹음된 양상을 보여준다. 장고와 거문고 반주로 경·서도 명창들이 전통적 방식의 잡가로 부른 것에서부터(①, ②) 박부용, 김란홍과 같이 기생이 전통적인 창법으로 노래하되 양악과 국악이 혼합된 일종의 퓨전밴드나 양악 관현악만으로 이루어진 반주 위에 노래를 한 새로운 형태가 있다. 이어 <방아타령>의 일부 멜로디만을 차용하여 작곡가들이 새롭게 창작한 창작가요를 강석연·왕수복처럼 비전통 가창자가 부르는 방법, 마지막으로 <방아타령>의 원음악텍스트는 그대로 놔두고 2부 합창으로 편곡한 형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방아타령>이 당시 재구성되어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새로운 음악언어로 등장하였던 서양 음악적인 화성과 악기를 도입하여 전래민요를 새롭게 편곡함으로써 신속요·신민요란 이름으로 일종의 ‘업그레이드’를 시키는 새로운 시도가 인기를 얻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엔까류의 유행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1930년대 중반이 되어서도 전통민요가 대중가요와 나란히 음반시장의 한 쪽에 둥지를 틀 수 있던 데에는 이렇게 양악적으로 각색한 신 속요와 신민요의 역할이 컸다. 이러한 양상을 전래민요의 혼종화(hybridization)로 설명할 수 있는데, 양악적 개입을 통해 전통을 새롭게 각색하는 작업은 긍정적 관점에서는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 사이의 연합으로 표현될 수 있고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야합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하고 많은 전통 성악곡 중에서 가곡, 가사, 시조, 긴잡가, 판소리 등등을 제치고 조선 후기까지 가장 전문 음악가들에게 예술적으로 별 볼일 없이 생각되었던 통속민요가 전통음악 부분의 음반 시장을 석권하였을까? 음반시장이 활성화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경기소리인 아리랑, 방아타령, 닐니리야, 경복궁타령, 서도소리의 대표적인 민요 수심가, 남도지방의 농부가 등이 20세기 초엽 잡가집에 등장하고는 있지만 긴잡가나 사설시조 등의 전통 성악곡의 비중을 능가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통속민요가 전통 성악곡에서 단연 우위를 점하게 되어 비주류 장르의 설움을 딛고 전통 성악의 주류 장르로 역전을 이루게 된 것은 다른 아닌 유성기 음반 산업의 성장에 기인한 것이다.

통속민요가 가장 선호되었던 전통 성악곡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형식이 반복되는 유절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3분 남짓의 유성기 음반의 취입에 적당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중 음악의 속성에 해당하는 용이성과 단순성이란 성질을 전통 성악 장르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잘 구현하고 있던 장르였다. 그러므로 통속민요는 전통음악의 여러 장르에서 최후까지 대중음악적 환경에서 음악 상품으로 살아남은 의사(擬似) 대중가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통속민요가 최첨단의 재즈송과 만요보다도 더 많이 취입되고 팔렸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도 민족말살 정책이 행해졌다고 하는 일제강점기말이다. 사실 1920년대가 되기 전 까지 음반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 즉 민족의 노래란 의미를 갖는 ‘민요’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1920년대 당시 기준으로 신조어였다. 언어는 사고의 집이란 말이 있듯이 민요란 말이 192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민요라는 개념과 사고가 그때서야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방아타령>은 무엇으로 불려졌을까? 우리 민중들에게는 그저 소리나 창으로 인식되었다. 민요는 속요(俗謠), 이요(里謠) 등과 함께 일본에서 들어와 1920년대부터 조선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어휘였다. 이 단어가 함축하는 바는 민족 국가의 한 단위를 이루는 지방, 지역의 노래로서 각 지방의 노래의 총합으로서 민족의 노래를 뜻한다. 1920년대 전에 <방아타령>이나 <창부타령>을 민요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 민족의 노래’라는 식의 개념을 가지고 노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국민국가를 모델로 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국민, 민족, 민요, 국민 문학 등이 부상하게 되었다. 1920년대의 조선은 일본 제국의 하부 단위로서, 한 지역으로서 민족지 조사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 민요라는 담론이 형성되고 민요라는 개념이 이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요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담론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데에는 일본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민요’가 발견되었던 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 학자들과 조선의 엘리트들에게 이식되어 담론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요는 어차피 발견되고 근대적 담론 속에서 재구성되었던 만큼, 특히 음반에 담겨질 상품으로서의 민요는 전통사회의 마을 공동체에서 불려진 바로 그 민요, 이를테면 진짜 민요일 필요는 없었다. 민요의 양식만을 취함으로써 도시화된 대중들에게 일종의 토속성과 잃어버린 고향과 같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이를 소비 하는 상품으로서의 역할이면 충분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이 시기 음반시장에서 민요가 생존한 데에는 민요 스스로의 자가 발전이라기보다는 시장의 수요를 조장하는 데 있어 이념적으로 기획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음반이나 활자매체를 통해 재구성되고 재발견된 민요는 식민지 엘리트들의 민족주의적 기획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민족주의적 엘리트로 분류되는 안기영의 사고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서양 음악을 전공하였지만 이화전문학교의 교사로서 이화전문합창단을 조직하고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하면서 이화권번(梨花券番)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비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간) 얼마나 우리의 민요를 무시하여 왔는가? 그 귀하고 고상한 노래를 다만 음란하고 방탕한 시간의 유흥믈로 만들어버렸으니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한가.”라는227) 안기영,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 『동광』 21호, 1931년 5월. 민족주의적 반성과 회개를 통해 민요를 구원하기 위한 음악 실천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민요에 양악적 옷을 입혀 민요의 현대화를 시도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항간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5세된 아이에게 7세 된 아이의 옷을 입히면 조금 크다고 하겠으나 아우가 변화되도록은 흉하지 않은 것이다 …… 즉, 7음계 화성을 5음계 멜로디에 붙이는 것은 결코 5음계 멜로디의 정조를 변케 만들지 않는다.”고228) 안기영, 앞의 글. 항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통음악은 아직 발육이 덜된 5살짜리 아우로서 형의 옷이라도 빌어 입어야 하는 알몸뚱이 신세로 그려지고 있다. 안기영으로 대표되는 식민지 음악 엘리트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은 즉 ‘낡은 나’는 보다 ‘성숙한 형(=새로운 남’)인 서양적 문명과 물질성에 의해 보완되어야 할, ‘결핍’된 어떤 것이었다.

식민지 양악 엘리트들이 시도한 민요의 혼종화 작업은 민요를 문 화적 측면에서의 식민지성을 극복하는 대안이자 회귀해야 할 고향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그 안의 낡고 미성숙된 요소가 부정되고 지양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 이중성을 본질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공, 민족주의적 근대화 기획의 한계와 의의를 동시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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