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4권 음악, 삶의 역사와 만나다
  • 5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
  • 03. 현장 돋보기1-조선시대
  • 민간에서의 사적인 공연
  • 연회
전지영

궁궐 밖 민간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연회였다. 연회에서의 공연은 주로 연회의 주체인 양반 권력층이 전문 악사나 기녀들을 초빙해서 빈객들 앞에서 연주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음 몇 가지 장면을 통해 당시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금사(琴師) 이마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수법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장지로 제일궁을 짚어 줄을 튕김에 가볍고 무거운 억양이 무상히 변하니, 5음 6육률의 청탁고하와 가늘고 굵으며 성글고 잦은 소리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가락의 기이한 변화가 당시 악사들보다 출중하여 음악을 즐기는 인사들이 다투기까지 하며 맞이하려고 하였다. 매양 달밤이면 빈 대청에서 마음을 놓고 가락을 타면 바람이 일고 물이 소용돌이치는 듯하며, 차가운 하늘에서 나는 귀신의 휘파람소리와도 같아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리칼이 쭈뼛 서게 하였다. 어느 날,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정승이거나 귀한 손님이었는데, 이마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한 곡조 타니 구름이 가듯 냇물이 흐르듯 끊어질 듯하면서 끊이지 않다가 갑자기 트이는가 하면 홀연히 닫히며, 펴지고 구부러지는 것이 변화무쌍하여 앉은 이들이 모두 맛을 잃어 술잔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정신을 빼앗기고 우두커니 앉아있었으니, 그 모습이 마치 우뚝 선 나무와 같았다. 갑자기 변하여 고운 소리를 내니 버들꽃이 나부끼듯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듯 광경이 녹아날 듯이 고은 듯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취하고 사지가 노곤해졌다. 또 다시 높이 올려 웅장하고 빠른 가락이 되니 깃발은 쓰러지고 북은 울리는 듯, 백만 병사가 일제히 날뛰는 듯, 기운이 분발하고 정신이 번쩍 들며 몸을 일으켜 춤추게 되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상성(商聲)으로 일어나니 숲이 흔들리고 나무도 흔들리 듯하여 산과 골짜기가 다 우는 듯하고, 치조로 되니 잔나비가 수심에 차고 두견이 원망하 듯하여 나뭇잎이 우수수 지니, 진정 감개가 처량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속눈썹을 적셨다. 다시 악기를 바로잡고 안족을 옮겨서 한 번 그으니 우레소리가 그친 듯, 메아리가 멀리 퍼지면서 창틈이 바르르 떨었다. 거문고를 무릎 아래 내려놓고 소매를 걷고 슬픈 얼굴로 하늘을 향해 탄식하기를 “인생 백년이 잠깐이요 부귀영화도 꿈꾸는 듯 순간인데 영웅호걸의 의기도 그가 죽고 나면 누가 알겠는가. 오직 문장에 능한 사람은 글을 남기고 글씨와 그림에 능한 사람은 그 자취를 남겨서 후세에 이르도록 이름을 전할 수 있으므로, 뒷사람이 그 자취를 비교하여 능력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으니, 천년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 같은 이는 몸이 아침 이슬로 사라지면 연기가 사라지고 구름이 없어지듯 하리니 비록 이마지가 음률에 능하였다 하나 뒷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그 품위를 알아주리오. 옛날 호파와 백아는 천하에 드러난 기술을 가졌으나 죽고 난 그날 저녁 이미 그 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 없었거늘, 하물며 천년이 지난 지금에 있어서랴” 하였다.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쉬니 자리에 앉은 이들이 모두 눈물로 옷깃을 적시었다.244) 김안로, 「國朝有琴師李馬智者」.

이수남(李壽男)군이 말하기를 “나는 관청 일을 마친 뒤에 친구가 잔치하고 즐기는 곳을 찾아 기생을 끼고 앉아서 여러 가지로 희롱하다가 밤이 깊어서 먼저 나와 기생과 더불어 같이 돌아오되 혹은 기생의 집에서 같이 자고 혹은 아는 사람 집으로 가서 비록 이불과 베개가 없으나 둘이서 옷을 벗고 같이 누우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지극한고. 나날이 이와 같이 하되 항상 다른 사람으로 바꾸니, 불교의 법도로 말하면 원컨대 다음 생에 수컷말이 되어 수 십마리 암말을 거느리고 마음대로 놀고 희롱함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김자고(金子固)가 말하기를 “나는 친구를 방 문하려고 하지 않으니 내 집이 족히 손님을 모실만 하고, 나의 재산이 잔치를 차림에 충분하여, 항상 꽃 피는 아침 달 뜨는 저녁에 아름다운 손님과 좋은 친구를 맞아 술통을 열고 술자리를 베풀어, 이마지(李亇之)가 타는 거문고와 도선길(都善吉)의 당비파와 송전수(宋田守)의 향비파와 허오(許吾)의 대금과 가홍란(駕鴻鑾)과 경천금(輕千金)의 노래와 황효성(黃孝誠)의 지휘로, 혹은 독주하고 혹은 합주하며 손님과 더불어 술을 부어주고 마음껏 이야기하고 시를 짓는 것이 나의 즐거워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245) 성현, 『慵齋叢話』.

송공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 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벼슬아치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으며, 붉게 분칠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이 때 진랑(황진이)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사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손들은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래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 때 송공은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다’하였다.246) 『국역 대동야승』.

이와 같이 주로 양반 지배층의 연회 장면에서 전문적인 음악가들이 동원되어 이루어지는 공연형태가 보편적이었으며, 전문적인 음악가 외에 자신들의 가기(家妓)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전문 음악가에는 유명 기악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기녀들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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