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1 여성의 몸, 숭배와 통제 사이
  • 01. 신성(神聖)한 몸
  • 비상(非常)한 여성들
김선주

고대 사회에서 여성은 신적인 존재로서 숭배되었을 뿐 아니라,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로서 존숭되었다. 신라에서는 남해왕대 처음으로 시조 묘를 세웠는데 누이인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19) 『三國史記』 卷32, 雜志第一, 祭祀條. 신라의 왕비 이름은 시조 비인 알영 이후 눌지 왕비까지 알(ar)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데, 이들 알계 왕비들은 아로와 같은 사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20) 나희라,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p.124, 2003.

신묘를 세우고 시조모인 유화를 신적인 존재로 숭상하였던 고구려에서도 여사제의 존재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왕이 군사를 내어 부여를 칠 때 비류수에 이르러 물가를 바라보니,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가서 보니 솥만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였더니 불을 지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더워졌다. 밥을 지어 온 군사를 배부르게 먹였다. 갑자가 한 장부가 나타나 이르기를, “이 솥은 본래 내 집 물건인데 내 누이가 잃어버렸으나, 지금 왕이 발견하였으니 짊어다 드리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정씨(負鼎氏)라는 성을 내렸다(『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대무신왕조(大武神王條)).

확대보기
부인대라는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되어 피장자를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황남대총 금관
부인대라는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되어 피장자를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황남대총 금관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2개의 봉분이 붙어 있는 표형분으로 여성이 피장된 것으로 알려진 북분에서 출토된 서봉총 금관
2개의 봉분이 붙어 있는 표형분으로 여성이 피장된 것으로 알려진 북분에서 출토된 서봉총 금관
팝업창 닫기

비류가에서 발견된 솥은 일상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불을 때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밥이 되는 신이한 물건이었다. 특히, 솥을 들고 춤을 추는 여성의 모습에서, 솥은 부정씨 부족의 제의와 관련된 제기로 춤추는 여성은 제의를 주관하는 여사제로 보기도 한다.21) 강영경, 「韓國 古代社會의 女性-三國時代 女性의 社會活動과 그 地位를 中心으로-」, 『淑大史論』 11․12합, 1982. p.171.

신라의 마립간기 묘제인 적석목곽분에서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금관이 출토되었다. 금관의 경우 종래는 왕관에 대입시켜 남성이 썼던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금관이 출토되었던 황남대총 북분의 경우 ‘부인대’라는 명문이 새겨진 허리띠가 출토되면서 피장자가 여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22) 金正基 外, 『皇南大塚』, 文化財管理局 文化財硏究所, 1985. 또한, 서봉총의 금관은 2개의 봉분이 연접되어 있어 부부묘로 알려진 표형분 가운데 여성이 피장된 것으로 알려진 북분에서 출토되었다.

당시는 여왕이 즉위하기 전이므로 이들 피장자는 왕으로 보기 어렵다. 여성이 묻힌 고분에서 금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금관이 곧 왕관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신라에서 금관은 왕경인 경주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출토 수량도 6개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금관이 출토된 고분은 대체로 대형이며 동반 유물도 최상급에 속한다.

이는 금관을 부장하였던 여성이 정치 사회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나뭇가지를 형상화한 금관에 대해 샤머니즘과 연관시킨 해석을 참조한다면,23) 이송란, 『신라금속공예연구』, 一志社, 2004. 금관이 출토된 최상급 고분의 주인공은 왕은 아니지만 신라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최상층의 여성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에서는 종교적 관념이 정치 사회적 원리의 배경이 되고 있고, 종교적 권위는 정치 사회적 권위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여성 고분에서의 금관 출토 역시 신라에서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존숭받았던 여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24) 최광식, 「三國史記 所載 老嫗의 性格」, 『史叢』 25, 1981.

고대 삼국에서 여성은 비상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존숭받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노구(老嫗)이다. 신라의 시조비인 알영은 노구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한다. 아진포에 도착한 탈해를 거두어 기른 것 역시 아진의선이라는 여성이었다. 또한, 소지왕이 벽화라는 어린 소녀에게 빠져 몰래 만나러 다니자 고타소군 노구가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노구가 글자상의 단순한 늙은 할머니가 아닌, 비 상한 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25) 『三國史記』 卷13, 高句麗本紀第一, 瑠璃明王 28年條.

부여에서는 고구려에서 보낸 외교 문서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는 노구가 등장한다. 부여왕 대소의 위협에 고구려 유리왕의 아들 무휼은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보낸다. 이에 대해 부여왕이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는데 알지 못하였다. 그때 한 노구가, “계란을 쌓아 놓은 것은 위태롭다는 말이요, 그 계란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전하다는 말이니, 그 뜻은 왕이 자기의 위태로움을 알지 못하면서 남이 내조하기를 바라니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느니만 못하다는 뜻입니다.”고 풀이하였다.

백제에서도 노구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온조왕대에 노구가 남자로 변한 사건이 있었고 그 뒤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고 하였다.26)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第一, 溫祚王 13年條. 동성왕대에는 노구가 여우로 변하여 도망한 뒤 자객에 의해 왕이 피살되었다.27)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第四, 東城王 23年條. 불길한 징조와 관련하여 노구가 나타나지만, 백제 역시 노구는 남자나 여우로 변할 수 있는 신이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