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1 여성의 몸, 숭배와 통제 사이
  • 03. 종속(從屬)의 몸
  • 개방적인 성, 혼인의 폐쇄성
김선주

고대 사회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와 혼인을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혼전이나 재가에 대한 금기가 없이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하였다는 것이지, 혼인이 개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은 혼인에 있어서 결정권이 없었고, 가부장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편이 없으면 상관없다는 말을 듣고 도화녀를 돌려보낸 진지왕은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 도화녀는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하고 있으며, 부모가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어기겠냐?’며 딸을 방으로 들어가게 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자신의 뜻에 따라 문희와 김춘추와 관계하여 아이를 가졌는데도, ‘부모에게 말도 없이 아이를 가졌으니 어쩐 일이냐?’며 누이를 태워 죽이겠다고 하였다.61) 『三國遺事』 卷2, 紀異第二, 太宗春秋公條. 고대 사회에서 연애와 혼인이 자유롭게 보이지만 실제 결정권은 가부장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혼인에 있어서 가부장의 뜻을 거스를 경우는 그에 따른 응징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설화적인 형태이지만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아버지인 하백 몰래 해모수와 야합하였다고 하여 쫓겨났다. 평강왕의 딸은 부왕이 정해 준 고씨와의 혼사를 거부하였다고 하여 궁에서 쫓겨났다.62) 『三國史記』 卷45, 列傳第五, 溫達條.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모 몰래 서현과 야합을 한 만명은 아버지에 의해 별실에 갇혀야 하였다.63) 『三國史記』 卷41, 列傳第一, 金庾信上條. 자신의 병역 의무를 대신한 가실을 자신의 딸인 설씨녀와 혼인하도록 주도한 것은 아버지였으며,64) 『三國史記』 卷48, 列傳第八, 薛氏女條. 과부였던 요석 공주 역시 태종이 원효와의 만남을 주도하고 있다.65) 『三國遺事』 卷4, 義解第五, 元曉不羈條. 헌안왕의 딸들 역시 아버지인 헌안왕이 응렴과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딸 중에 하나를 선택할 권리는 응렴에게 있었다.66) 『三國遺事』 卷2, 紀異第二, 第四十八景文大王條. 이는 혼인에 있어서 가부장의 선택과 허락이 가장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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