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1. 불교의 시대, 여성 계보의 중요성
  • 이데올로기로 보는 몸관
  • 2. 법이 규정하는 여성의 몸
권순형

여성에 대한 생각은 국가의 법제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고려는 상과 벌을 통해 여성들에게 바람직한 역할을 유도해 나갔다. 예컨 대 남편에게 내조를 잘 하였다거나 자식을 잘 기른 여성에게 벼슬을 주거나 곡식을 상으로 내렸다. 여성의 벼슬은 내·외명부(內外命婦)를 말하는 것으로서 왕비나 공주 등 왕실 여성들이 일차적인 대상이었지만 일반 여성들도 남편이나 자식이 고위 관직에 오르면 국대부인(國大夫人)·군대부인(郡大夫人)·군군(郡君)·현군(縣君) 등이 될 수 있었다. 예컨대 고려 중기의 관리 황보양(皇甫讓)의 처 김씨(1085∼1149)는 남편의 관직이 승진함에 따라 1122년(예종 17) 낙랑현군, 1124년(인종 2) 낙랑군군, 1133년(인종 11) 낙랑군부인이 되었다.70) 김용선,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154.

또한, 3아들이 급제를 하였거나, 남편이나 자식이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도 여성에게 벼슬을 주었다. 즉, 원 간섭기의 재상 김태현(金台鉉)의 처 왕씨(1255∼1356)는 아들 셋이 과거에 합격해 군대부인에 봉작되고 국법에 따라 매년 곡식을 받았다.71) 김용선, 「김태현 처 왕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p.973∼974. 그 딸 김씨(1302∼1374)도 4명의 아들 이 급제해 혜택을 입었다. 그들은 “우리 한 집안의 두 아낙네가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도 후하게 은전을 받고 있으니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라며 곡식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72) 김용선, 「박윤문 처 김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1023. 또 공민왕 이래 재상을 지낸 이림(李琳, ?∼1391)의 딸이 우왕의 근비(謹妃)로 책봉되자, 아버지인 이림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어머니 홍씨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할머니 이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73) 『고려사』 권116, 열전29, 이림. 부인이나 어머니에게 상을 주는 것은 내조와 양육에 대한 보상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국가에서는 여성의 재생산 기능을 중시해 쌍둥이를 낳으면 곡식을 주었는데, 이는 다산 장려 및 구휼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에서는 상을 통해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과 양육, 내조의 역할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법제에는 여성에 대한 처벌 규정들도 보인다. 우선 여성은 남성에게 속한 존재였다. 처가 마음대로 남편을 떠나거나, 떠나서 개가하면 중죄로 처벌하였다.74) “처가 제 마음대로 집을 떠났을 때는 도형 2년에 처하고 개가를 하면 2천 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며, 첩이 제 마음대로 집을 떠났을 때는 도형 1년 반에, 개가를 하면 2년 반에 각각 처하며, 이들을 아내로 취한 자도 같은 죄를 주되 유부녀임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묻지 않았다”(『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공식 호혼). 이는 여성의 주인이 남편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들이 풍속과 관련된 죄를 범하였을 때는 남편 이나 자식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예컨대 종친인 왕박(王璞)은 의종의 딸 안정궁주(安貞宮主)와 혼인하였는데 궁주가 거문고를 배우다 악사와 간통하였다. 명종은 그가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였다며 작위를 삭탈하였다.75) 『고려사』 권90, 열전3, 종실1 평양공 기 등. 또 공양왕 때 공조총랑 박전의(朴全義)는 그 어미와 중의 간통을 막지 못하였으므로 헌부의 탄핵을 받았다.76)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 3년 9월 갑오. 즉, 남편이나 아들에게 처나 어머니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를 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이 같은 죄를 범하였을 때 아내를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한, 처는 남편의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였다. 물론 자신의 부모와, 남편 역시 처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차별이 있었다. 처나 첩이 남편의 조부모, 부모에게 욕설을 하였을 때는 도형 2년에 처하고, 구타를 하면 목을 매어 죽였으며, 상처를 입히면 목을 베어 죽였다.77) 『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공식 대악. 반면 남편이 처의 부모에게 욕설을 하였을 때는 처벌 규정이 없으며, 처의 부모를 때렸을 때는 10악죄(惡罪) 중 불목죄(不睦罪)로 처벌하였는데,78) 『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공식 대악. 이는 사형이 아니라 유형죄였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에 대한 불효는 칠거지악의 하나였으며, 이를 이유로 아내를 버린 남편은 효자로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예컨대 성종 때 운제현(현재 전주 지역) 지불역의 백성 차달(車達)은 그 처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지 못한다며 즉시 이혼하였다. 왕은 그에게 역이 아닌 일반 주현에 편입해 살게 하고, 곡식과 비단 등을 상으로 주었다.79) 『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9월 병자.

이처럼 법과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가정 내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며 국가적으로는 역을 담당할 자식을 낳고 기르는 존재였다. 여성은 사회 활동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종교적인 성취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 전근대 여성들에게 공통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같은 역할을 하였던 전근대 여성들 간의 ‘차이’이다. 즉, 고려시대 여성과 조선시대 여성, 중국의 여성과 요·금의 여 성 등은 공통점도 있지만 분명 차이점도 있다. 이는 각각의 사회 내 가족 및 친족 구조, 여성에 대한 인식이나 가족 내에서의 위상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특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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