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2. 유대의 매개물, 여성의 몸
  • 여성으로 일군 가문의 영광
  • 1. 태조의 후비들
권순형

태조 왕건(王建, 877∼943)은 송악 지역의 호족으로서 처음에는 궁예의 부하였다가 궁예를 밀어내고 나라를 세웠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큰 기여를 한 것은 29명에 달하는 그의 후비들이었다.

<표> 태조의 후비들
  후비의 이름 아버지의 성명과 관직 출신지
1 신혜왕후 유씨
(神惠王后 柳氏)
이중대광 유천궁(柳天弓) 정주(개성시 풍덕군)
2 장화왕후 오씨
(莊和王后 吳氏)
다련군(多憐君) 나주
3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神明順成王太后 劉氏) 태사 내사령 유긍달(劉兢達) 중주
4 신정왕태후 황보씨
(神靜王太后 皇甫氏)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 황보제공(皇甫悌恭) 황주(황해북도)
5 신성왕태후 김씨
(神成王太后 金氏)
잡간 검억렴(金憶廉) 경주
6 정덕왕후 유씨
(貞德王后 柳民)
시중 유덕영(柳德英) 정주
7 헌목대부인 평씨
(獻穆大夫人 平氏)
좌윤 평준(平準) 경주
8 정목부인 왕씨
(貞穆夫人 王氏)
삼한 공신 태사 삼중대광 왕경(王景) 명주
(강원 강릉)
9 동양원부인 유씨
(東陽院夫人 庾氏))
태사 삼중대광
유금필 (庾黔弼)
평주
(황해북도 평산)
10 숙목부인(淑穆夫人) 대광 명필(名必) 진주(충청북도 진천)

11
천안부원부인 임씨 (天安府院夫人 林氏) 태수 입언(林彦) 경주
12 흥복원부인 홍씨
(興福院夫人 洪氏)
삼중대광 홍규(洪規) 홍주(충청남도 홍성)
13 후대량원부인 이씨 (後大良院夫人 李氏) 대광 이원(李元) 합주(경상남도 합천)
14 대명주원부인 왕씨 (大溟州院夫人 王氏) 내사령 왕예(王乂) 명주
15 광주원부인 왕씨
(廣州院夫人 王氏)
대광 왕규(王規) 광주(경기도)
16 소광주원부인 왕씨 (小廣州院夫人 王氏)
17 동산원부인 박씨
(東山院夫人 朴氏)
삼중대광 박영규(朴英規) 숭주(전라남도 순천)
18 예화부인 왕씨
(禮和夫人 王氏)
대광 왕유(王柔) 춘주(강원 춘천)
19 대서원부인 김씨
(大西院夫人 金氏)
대광 김행파(金行波) 동주
(황해북도 서흥)
20 소서원부인 김씨
(小西院夫人 金氏)
21 서전원부인
(西殿院夫人)
미상 미상
22 신주원부인 강씨
(信州院夫人 康氏)
아찬 강기주(康起珠) 선주
(황해북도 선천)
23 윌화원부인
(月華院夫人)
대광 영장(英章) 마상
24 소황주원부인
(小黃州院夫人)
원보 순행(順行) 황주
25 성무부인 박씨
(聖茂夫人 朴氏)
삼중대광
박지윤(朴智胤)
평주
26 의성부원부인 홍씨 (義城府院夫人 洪氏) 태사 삼중대광
홍유(洪儒)
의성(경상북도)
27 월경원부인 박씨
(月鏡院夫人 朴氏)
태위 삼중대광
박수문(朴守文)
평주
28 몽량원부인 박씨
(夢良院夫人 朴氏)
태사 삼중대광
박수경(朴守卿)
29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대광
선필(宣必)
해평(경상북도 구미)

앞의 표에 의하면 태조는 각지의 호족 딸들과 혼인해 그들과의 연계를 강화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한 집안에서 2명, 3명 등 여러 명의 부인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광주의 호족 왕규는 자매(15, 16)를 태조의 비로 들였으며, 이후 태조의 아들인 혜종에게도 딸 하나를 더 시집보냈다. 동주인 김행파는 태조가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두 딸(19, 20)에게 번갈아 태조를 시침(侍寢)하게 하였다.

이 외에도 후대량원부인(13), 대명주원부인(14), 소황주원부인(24)의 존재는 비록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각각 전대량원부인, 소명주원부인, 대황주원부인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으므로 역시 자매혼이 의심되는 경우이다. 이처럼 한 집안에서 두 명, 세 명씩 후비로 들인 것은 태어날 자손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태조와 사돈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구태여 자매를 모두 시집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딸을 후비로 들이면 그만큼 자식을 낳을 확률도 높아진다. 실제로 왕규는 태조에게 들인 두 딸 중 둘째에게서 외손을 보았으며, 태조와 그 아들 정종에게 딸 셋을 시집보낸 박영규는 그 중 셋째 딸인 정종비 성무부인 박씨에게서만 외손을 보았다.

외손은 당시의 친족구조 내에서 ‘친손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당시 외가와의 밀접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고려 왕실의 세계이다. 태조 왕건의 증조모인 정화왕후(貞和王后)는 국조 원덕대왕 보육(元德大王 寶育)의 딸로서 당나라 숙종황제와 인연을 맺어 왕건의 조부인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을 낳았다. 의조는 원창왕후 용녀(元昌王后 龍女)와 혼인해 왕건의 아버지 세조 위무대왕(世祖 威武大王)을 낳았고, 세조는 위숙왕후(威肅王后)와 혼인해 왕건을 낳았다. 즉,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 할아버지와 함께 추존한 조상은 증조부가 아니라 증조모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가 부계 중심의 친족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입증시킨다. 친손과 다름없는 외손의 존재는 확실히 호족들에게 더 큰 권력을 보장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호족들은 자매를 왕비로 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곧 자신의 집안이 왕권과 밀착됨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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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들의 바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태조의 후비들이 낳은 아들들은 거의 모두 ‘태자’로 불렸다. 태자란 분명 왕위 계승자에 대한 지칭이다. 물론 태조의 가장 큰 아들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무(뒤의 혜종)를 정윤(正胤)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윤이 당시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였다 하겠지만 다른 아들들을 태자로 칭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언제고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실제로 외가가 한미하였던 혜종은 정계의 실력자 박술희(朴述熙, ?∼945)의 후원을 통해서야 정윤이 될 수 있었고,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된 태조는 그를 당시 군권을 갖고 있던 진천 임씨 집안과 혼인시켰다. 그러나 태조 사후 태조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된다. 혜종의 배다른 형제 광주원군의 외할아버지이며 동시에 혜종의 장인이기도 하였던 왕규 (王規, ?∼945)는 혜종을 죽이고 광주원군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넣기도 하고, 직접 부하를 인솔해 벽을 뚫고 왕의 침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92)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왕규. 그래도 왕은 그를 벌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세력은 막강하였다. 결국 혜종의 배다른 형제인 충주 유씨 출신 왕자 요(堯, 뒤의 정종)와 소(昭, 뒤의 광종)에 의해 왕규는 제거되고 이후 왕위는 충주 유씨계 왕자들에 의해 계승된다.

왕실에서는 강력한 호족들에 대해 족내혼으로 대항하였다. 왕규가 충주 유씨 출신 왕자인 요와 소를 참소하자 혜종이 자신의 딸을 요와 혼인시켰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에도 공주들은 거의 모두 왕실 내에서만 배우자를 구하였다. 족내혼은 왕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고려 초 여성의 몸은 가부장에 의한 정략혼의 대상이었으며, 후손을 낳아 외가의 영광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이 시기 가부장성이 특히 잘 드러나는 것이 대·소서원 부인의 경우이다. 그녀들은 대광 김행파의 딸들로서, 서경으로 가는 태조를 아버지가 도중에 만나 집으로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틀을 유숙시키면서 두 딸로 하여금 하룻밤씩 모시게 하였다. 그 후 태조는 다시 그녀들을 찾지 않았고, 자매는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뒤에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은 태조는 그녀들을 불러 보고는 “그대들이 이미 여승이 되었으니 그 결심을 꺾을 수 없구나!”라며, 서경 성안에 대서원과 소서원의 두 절을 지어 머물게 하였다.93)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대서원부인 및 소서원부인.

즉, 이들 자매는 태조에게 잘 보이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태조와 잠자리를 함께 하였고, 이후에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승려가 되었던 것이다. 반면 아래의 사료는 조금 다르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이었다. 조부는 오부돈(富鄧)이고 부친은 다린군(多憐君)이니 대대로 나주의 목포에서 살았다. 다련군은 사간(沙干) 연 위(連位)의 딸 덕교에게 장가들어 왕후를 낳았다. 일찍이 왕후의 꿈에 포구에서 용이 와서 뱃속으로 들어가므로 놀라 꿈을 깨고 이 꿈을 부모에게 이야기하니 부모도 기이하게 여겼다. 얼마 후에 태조가 수군(水軍) 장군으로서 나주에 진을 쳤는데, 배를 목포에 정박시키고 시냇물 위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다. 가서 본즉 왕후가 빨래하고 있으므로 태조가 그를 불러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았는 바 그가 혜종(惠宗)이다.94)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장화왕후 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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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왕후는 아버지의 의사로 혼인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목포에 수군 장군으로 내려온 왕건과 마주치게 되었고, 왕건은 그녀의 신분을 확인한 뒤 그저 하루를 즐기려하였다. 물론 왕건은 목포가 후백제 영역이니 이 지역 호족과의 연계를 바라기는 하였겠지만, 그녀의 집안이 너무 미약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이 삶의 거의 유일한 기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왕건의 아이를 갖고자 하였고, 결국 임신에 성공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낳은 게 아들이었고, 그녀는 왕후가 되었다. 이후 목포를 포함한 나주는 왕건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고, 왕건이 후삼국과 전쟁하는데 결과적으로 큰 보탬이 되었다. 이처럼 이 시기 여성은 가부장에 의해 정략혼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으나 장화왕후처럼 아주 드물지만 스스로 운명을 만들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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