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2. 유대의 매개물, 여성의 몸
  • 여성으로 일군 가문의 영광
  • 4. 독신녀
권순형

고려시대에서 특이한 것은 독신녀의 존재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려의 독신녀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래의 사료를 보자.

아버지를 섬기며 효성을 다하였고, 집 안에서 모실 때에도 공손하며 화목하여 아녀자의 덕이 어질고 밝았기 때문에 대원공이 더욱 사랑하여 아들처럼 여겨 후사를 전하고자 하였다. 세상에 짝이 될 만한 남자가 드물어 홀로 살았지만 태연자약하였으니, 그윽하고 아름다운 자질은 향기로운 봄 꽃이 홀로 피어 있는 듯하고, 굳고 곧은 절개는 깨끗하여 더렵혀지지 않았다. 좌우에 부리는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였으니 사람 됨됨이를 잘 알아보았으며, 재물의 유혹을 받지 않았으니 근검절약하여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귀중한 보물과 골동품들을 조금도 허비함이 없이 삼가며 지켰으니, 아, 훌륭하다.101) 김용선, 「왕재의 딸 왕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384.

위의 여성은 숙종의 셋째 왕자 왕효의 외손녀인 왕재(王梓)의 딸(1141∼1183)이다. 그녀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아버지를 모시다 43세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왜 혼인을 하지 않았을까? 묘지명의 내용을 볼 때, 용모나 성품, 건강 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세상에 짝이 될 만한 남자가 드물어”라는 구절이 약간이나마 시사점을 준다. 고려시대에 혼인은 같은 신분 내에서도 세밀하게 가격(家格)을 따져 혼인하였다. 게다가 승려가 되는 남자들이 많아 귀족 딸들의 경우 적합한 짝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102) 권순형, 『고려의 혼인제와 여성의 삶』, 혜안, 2006, pp.88∼92. 그녀도 이 때문에 혼기를 놓쳤던 것으로 보이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그녀는 홀로 집안을 이끌며 가산을 유지 하였다.

인종의 외손녀인 왕영(王瑛)의 딸(1150∼1185) 역시 혼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덟 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 슬하에서 공손하고 맑게 자라났다. 열대여섯 살이 되자 용모가 아름답고 행동이 법도에 맞아 훌륭한 규수가 되었다. 혼기를 놓쳤지만 아버지를 섬기는데 게으르지 않았고, 또 불교를 깊이 믿었다. 항상 화엄경과 여러 불경 읽는 것을 일과를 삼아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다 36세에 병으로 죽었다.103) 김용선, 「왕재의 딸 왕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393.

조선시대에는 사족의 여자들이 늦게까지 혼인을 하지 못하면 부모를 벌주고, 만일 가난 때문에 혼인이 여의치 못한 것이었으면 국 가에서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즉, 모든 여성은 혼인해야 하였고, 이는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을 강조하던 종법적 사고 방식에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부계 중심의 종법 의식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기본 종교였던 불교에서 혼인을 필수적인 일로 강조하지 않았다. 불교에서 혼인은 사적인 일로서, 신도들에게 혼인을 하라거나 혹은 독신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라는 등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와 같은 독신녀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신남도 있었다. 예종 때 관리 곽여(郭輿, 1058∼1130)는 어렸을 때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지도 않고 항상 자기 방에서 글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면서도 성 밖에 작은 암자를 짓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쉬었다. 예종이 태자 때부터 그를 알아, 즉위한 뒤 불러 궁궐에 머물게 하였다. 뒤에 그가 은거할 것을 청하자 왕이 동편 교외 약두산 봉우리에 거처할 집을 꾸려 주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었고, 심지어는 도교·불교·의학·약학·음양설에 관한 서적까지 모두 독파하였으며, 한 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궁술·기마·음률·바둑 등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72세에 죽었으나 평생 혼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임지의 기생을 서울로 데려오기도 하였고, 산재(山齋)에도 비첩(婢妾)이 있어 여론이 좋지 않았다.104) 『고려사』 권96, 열전10, 곽상 부 곽여.

즉, 그는 거의 현대의 독신남처럼 평생 혼인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이 역시 종법적 사고가 없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성취가 오직 남편이나 자식에 의해서만 주어지던 시대에, 과연 여성이 스스로 독신으로 살기를 원하였을까? 그 선택 여부야 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고려시대 여성의 몸이 꼭 혼인해 남의 집의 대를 이어주어야 하 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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