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2. 유대의 매개물, 여성의 몸
  • 공납물로서의 몸
  • 1. 비운의 공녀(貢女)
권순형

고려는 13세기에 들어 세계 최강의 군대인 몽골군과 30년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1259년(고종 46) 원과의 강화가 성립한 뒤에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매년 막대한 공물과 여자를 바쳐야하였다. 고대 이래 전쟁은 늘 있어왔지만, 원처럼 공식적이며 지속적으로 공녀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이는 몽고가 유목 국가로서 금이나 은, 식량 등 다른 물품과 함께 여성 역시 약탈품으로 생각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들은 약탈한 여성을 노예로 삼거나 처첩으로 데리고 살았다. 몽골족은 다른 유목 민족과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였으며,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들은 아들에게 처분권이 있었다. 아들이 데리고 살든지, 아니면 다른 데 시집보냈다. 이처럼 고려와는 다른 원의 몸 관념 때문에 고려의 여성들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공녀의 대상은 왕실의 여성부터 일반 서민의 여성까지 모두가 포함되었으며,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다.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부녀의 수가 2천명을 넘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 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

공녀가 되면 평생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대부분 궁중 시녀나 노비로 일생을 보내야 하였다. 원 간섭기의 학자 이곡은 공녀 징발의 문제에 대해 원나라에 상소문을 올렸다. 그 글에는 공녀 징발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딸을 낳으면 비밀에 붙여 이웃 사람도 볼 수 없게 하였다. 혹 딸이 공녀로 선발되면 그 부모와 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 그치지 않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엎어져 길을 가로 막기도 하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통곡한다. 개중에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은 자가 있는가 하면, 목을 매어 죽는 자도 있으며, 또 기가 막혀 기절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피눈물을 쏟고 실명하는 자도 있었다 한다.105) 『고려사』 권109, 열전 22, 이곡.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딸을 공녀 선발에서 제외시키려 하였던 것은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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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묘
이곡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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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왕이 공주와 더불어 양가(良家)의 처녀를 선발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바치려고 하였을 때 홍규의 딸도 그 선발에 걸렸으므로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빠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홍규가 한사기(韓謝奇)에게 말하기를 “나는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하였더니 한사기가 말하기를 “글쎄 당신에게까지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라고 하였으나 홍규가 그 말은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공주가 이 소식을 듣더니 크게 성을 내어 홍규를 잡아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하였으며 그 집 재산을 몰수하였다. 또 그 딸을 잡아 가두고 물어 보니 딸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잘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그를 땅바닥에 자빠뜨리게 하고 쇠로 만든 매로 난타하게 하니 그의 피부가 온전한 데가 없으나 그래도 종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이 공주에게 홍규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니 소소한 죄로 인하여 무거운 형벌을 가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며 또 중찬 김방경이 역시 병석에서 부축을 받으면서 나와 용서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공주가 듣지 아니 하고 해도에 귀양 보내고 말았다. 얼마 안 되어 홍자번이 힘써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돌려주게 되었으나 공주의 성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그의 딸을 원나라 사신 아고대(阿古大)에게 주었다.106) 『고려사』 권106, 열전19, 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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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 처 김씨 묘지명
홍규 처 김씨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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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는 남양 홍씨로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충렬왕이 세자로 있던 시절에 그를 도와 원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 딸조차 공녀를 면할 수 없었고, 딸을 승려로 만들어서까지 공녀를 피하고자하였던 그는 결국 섬으로 귀양을 가야만 하였다. 딸을 통해 세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마치 고려 초 호족들이 왕건에게 딸을 바치듯 솔선해 딸을 공녀로 내놓았다. 홍원사 진전 직(直)인 장인경(張仁冏)은 원나라 평장 아합마(阿哈馬)가 미녀를 구하자 자기 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장인경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가 딸을 팔아 관직을 얻었다며 비난하였다. 그런데 정작 아합마는 그 여자가 명문가의 딸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다.107) 『고려사』 권29, 세가29, 충렬왕 6년 4월 병술.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은 대부분 같은 계층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일부는 지배층의 잉첩(媵妾)이 되었고, 신분이 높은 여성은 왕이나 고위 관인의 배우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신분 상승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궁인 이씨는 비파를 잘 타서 세조의 총애를 받았고, 화평군 김심(金深)의 딸 달마실리(達痲失里)는 인종의 비(妃)가 되었다가 황후로 추봉(追封)되었다. 가장 출세한 사람은 기황후(奇皇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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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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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는 행주인 기자오의 딸로서 1333년(충숙왕 2) 원에 끌려가 궁녀가 되었다. 황제의 찬간에서 차를 끓이다 순제의 눈에 든 그녀는 1339년(충숙왕 복위 8)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고 1365년(공민왕 14) 몽골인이 아닌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가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벼슬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영안왕으로 추증되고 어머니 이씨는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이 되었다. 오라비 기철은 정동행성 참지정사 및 덕성부원군이 되고, 기원은 한림학사 덕양군이 되었다. 기씨 일문의 세도와 호사는 극에 달하였으나 한족의 반란운동이 거세지고 1368년(공민왕 17) 적병이 원 궁성에까지 도달하게 되자 그녀는 순제와 함께 북으로 달아나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이후 공민왕은 반원정책으로 기씨 일족을 처단하였다.

공녀로 인해 양국의 문화가 교류되었는데, 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 여성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계혼(嫂繼婚)의 문제였다. 수계혼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이 형수만이 아니라 서모(庶母)까지 포함되었다.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은 원의 수계혼 풍속을 받아들여 서모를 후궁으로 취하거나 강간하였다. 예컨대 충선왕은 부왕 사후 서모였던 숙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자, 신하였던 우탁이 소복을 입고 도끼를 들고 왕 앞에 나아가 그 부당함을 상소하기도 하였다.108) 『고려사』 권109, 열전22, 우탁. 충혜왕은 부왕의 후궁인 경화공주(慶花公主) 백안홀도(伯顔忽都)와 수비권씨(壽妃權氏)를 강간하였다.109)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경화공주 및 수비 권씨. 몽고녀 경화공주의 강간은 충혜왕이 뒤에 왕위에서 쫓겨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수계혼으로 인한 수난은 고려씨(高麗氏)가 대표적이다. 고려씨는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중서평장사 고고대(庫庫岱)의 둘째 부인이 되었다. 남편 사후 첫째 부인의 아들이 그녀를 취하려 하였다. 그녀가 완강히 거절해 일이 여의치 않자 아들은 권력가 백안(伯顔)의 힘을 빌어 그녀를 취하려 하였으나 그녀는 밤에 담을 넘어 도망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그녀는 잡혀와 참혹하게 고문을 당하였는데, 국공(國公)의 도움으로 죄를 면하게 되었다.110) 陶宗儀, 「고려씨수절」, 『南村輟耕錄』 15 : 장동익, 『元代麗史資料集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83.

중국이나 고려 같은 농경 민족에게 있어 아비의 처첩을 취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중죄였다. 고려의 법에 따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첩과 눈이 맞아 화간한 경우도 교수형이었으니111) 『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공식 간비. 강간은 말할 것도 없다. 고려의 여성들에게 아들과의 혼인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원 간섭기 여성들은 예전과 달라진 여성의 몸에 대한 관념과 태도 때문에 더욱 많은 고통을 당해야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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