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3. 성·신체·재생산
  • 욕망하는 몸
  • 1. 남편 생전에 한정된 정조
권순형

고려의 기본 신앙이었던 불교에서는 육체나 성을 중시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은 어떤 위대한 영적 가능성도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혼이 영적인 완성의 경지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본다. 즉, 육체에 대한 욕망은 인간을 끊임없이 환생하게 만들므로 성욕은 해탈을 방해하는 최대의 악이라는 것이다. 아래의 사료는 이를 잘 보여준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설명하겠다. 너희들에게 알리겠다. 저 거대하고 불타고 있는 불덩이를 껴안고 앉거나 눕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부드럽고 보드라운 손과 발을 지닌 크샤트리아의 소녀, 바라문의 소녀, 거사의 소녀를 껴안고 앉거나 눕는 것이 나은가? 부처님께서는 전자가 낫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전자는 단지 심한 고통이 있지만 후자는 오랫동안 불행과 고통이 있고 몸이 부서져 죽은 후에 낮은 세계, 악도, 타악처, 지옥에 태어나기 때문이다.118) 『증지부』 권4.

여기서 여성은 해탈을 방해하는 성욕과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성은 피해야 할 것인데 성욕을 일으키는 것이 여성이니, 비구에게는 여자가 불보다 더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승려가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금욕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이에 불교에서는 부부간에 서로 도리를 지켜 간음은 물론 자기 아내와 남편 이외의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한다. 만일 부부가 사별할 경우는 또 다른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혼인 생활에 충실하면 된다. 재혼을 금하거나 남편 사후까지 수절하라고는 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윤회의 고리 속에서 어느 순간 인연에 의해 부부가 되었지만 그 인연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가 죽으면 그들은 각자의 업에 따라 다시 윤회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기혼자의 혼인 외 관계만 아니라면, 성애 자체를 막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같은 불교지만 탄트라파의 경우는 좀 달랐다. 이들은 기존의 불교와 달리 몸을 긍정하고 있다. 즉, 그들은 신성이란 오직 몸을 통해 알려질 수 있으며, 몸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몸의 욕구를 누를 게 아니라 깊이 성찰해 심원한 정신적 체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몸의 욕망이 긍정되면서 성교는 단순한 육체적 결합이 아니라 우주와의 합일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성적인 문란이었다. 몸이 해탈의 도구라 여겨지면서 남자가 여자의 육체를 더욱 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게다가 원에서는 탄트라가 기존 중국의 방중술과 결합해119)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p.107. 한층 성적으로 문란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는 원 간섭기 고려에도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원 간섭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성에 대해 한층 다양하고 분방한 모습들이 나온다.

예컨대 충렬왕이 잔치와 놀이를 즐겼으므로 측근들은 기악과 여 색으로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힘썼다. 관현방의 태악재인(太樂才人)으로는 부족해서 신하들을 각 도에 파견하여 관기로서 얼굴이 아름답고 기예가 있는 여자를 선발하였다. 또 노래와 춤을 잘하는 여자들을 뽑아 궁중에 두고 비단 옷을 입히고 말총갓을 씌워 따로 한 대열을 짓게 해 이를 ‘남장(男粧)’이라 불렀다. 이들에게 <쌍화점>이나 <사룡(蛇龍)> 같은 노래를 가르치고 소인의 무리와 더불어 밤낮으로 가무를 하고 음탕하게 놀았다. 때문에 더 이상 군신의 예절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여기에 드는 경비와 비용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120) 『고려사』 권71, 지25, 악2 속악 사룡. <쌍화점> 등은 본래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였는데, 이 무렵부터 궁중에서도 불리게 되었다. 즉, 남녀상열지사의 대표로 지목되는 고려 가요가 궁중악이 된 것이 이 시기였던 것이다. 이것들은 기존의 우아한 궁중악과는 달리 남녀 간의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성 관련 그림이나 서적도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제현과 교분이 있던 화가 조맹부는 성애도를 잘 그렸는데, 그의 36가지 체위도는 명·청 시대 춘화의 텍스트였다 한다.121) R. H. 반홀릭, 장원철 옮김, 『중국성풍속사』, 까치, 1993. 뿐만 아니라 열약(熱藥) 혹은 조양환(助陽丸)이란 이름의 최음제도 보인다. 원 세조가 충렬왕에게 보내준 송나라 출신 의사 연덕신은 조양환을 조제할 줄 알아 왕과 공주에게 사랑 받았다. 관리 오윤부는 그 약을 먹어보고 “이 약은 수태하는 데 좋지 못하니 삼한의 후손이 번성하지 못하게 하는 자가 바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말 제국대장공주는 해마다 임신을 하였는데, 왕이 이 약을 사용한 후부터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였다.122)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제국대장공주. 또한, 충혜왕도 열약을 즐겨 먹어 여러 비빈들이 성적 생활을 견디지 못하였는데, 오직 은천옹주(銀川翁主)만 이를 감당해 총애를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123)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은천옹주 임씨. 또 왕의 열약 복용으로, 상대 여성들이 임질과 같은 병에 걸리는 일도 많았다 한다.124) 『고려사』 권106, 열전19, 홍규.

뿐만 아니라 서모를 강간한다거나 관음증, 동성애 등 예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행태들도 보인다. 부왕의 후궁을 자신의 후비로 삼거나 강간하는 것은 원의 수계혼 영향이겠으나, 이전에 이런 전통이 없고 참혹한 범죄로 간주되어왔던 정서에서 볼 때, 이는 ‘성의 문란’ 외에 다른 표현을 쓸 수 없을 것이다.

관음증과 동성애는 공민왕에게서 보인다. 아래의 사료를 보자.

공주가 죽은 후에 여러 왕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으나 별궁(別宮)에 두고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여 드디어 정신병이 생겼다. 그리하여 항상 자신을 여자 모양으로 화장하였으며, 먼저 젊은 내비(內婢)를 방안에 불러들여서 보자기로 그 낯을 가리고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들여서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하여 놓고 왕은 곁방에서 문틈으로 엿보았다.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등을 자기 침실 내로 불러들여서 마치 남녀 사이와 같이 자기에 대하여서 음행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명을 갈아 대고야 그쳤다. 이로부터 아침 늦게야 일어났고 혹 만족한 일이 있으면 제한 없이 상을 주었다. 왕은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과 한안 등을 시켜 여러 왕비를 강간케 하고 거기에서 아들을 낳으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125) 『고려사』 권43, 세가43, 공민왕 21년 10월 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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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공주
공민왕과 노국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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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노국공주(魯國公主, ?∼1365) 사후 깊은 실의에 빠졌다. 이에 관음증 같은 성도착증도 생겼고, 급기야는 자제위 소속 군인들인 홍륜과 한안 등에게 후비를 간음케 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공민왕의 성에 대한 기사는 정치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자손인 우왕과 창왕을 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 조선왕조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설사 지어낸 것이라 할지라도, 원 간섭기 이후 한층 문란해진 성 풍조가 심지어 이런 이야기 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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