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3. 성·신체·재생산
  • 욕망하는 몸
  • 2. 남녀상열지사
권순형

앞에서 불교의 성 관념이 전후기에 차이가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념은 실제로 여성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데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일단 불교에서는 재가 신자들에게 부부간에 정절을 지키라는 가르침을 중시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유부녀가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하였다면 당연히 현실의 법에서도 간통죄로 처리되었다. 간통은 쌍벌죄로서 당률에 의하면 남녀 모두 도형 1년 반, 유부녀일 경우는 1등급 가중하여 도형 2년에 처하였다. 전근대 시대의 형벌 체계는 태형·장형·도형·유형·사형의 5형 체제였다. 도형은 죄인에게 매를 치고, 1년에서 3년까지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간통 대상자가 친척 간이었다면 이보다 더 무겁게 처벌하였다. 또 주인과 종이 간통을 하였을 때도 엄중 처벌하였다. 부곡인 및 노비가 주인 또는 주인의 가까운 친척과 간통하면 교수형, 강간하면 목을 베어 죽였다. 화간한 여자는 남자보다 1등급을 감해 곤장 1백대를 치고 3천리 밖으로 유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것이 여자 주인과 남자 노비의 경우라는 점이다. 거꾸로 남자 주인과 여자 노비의 경우는 아예 처벌 규정이 없다. 즉, 여자가 자기 집 남자 노비와 간통한 것은 거의 죽을 죄이지만, 남자가 자기 집 여자 노비와 간통한 것은 죄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자기의 처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그들을 잡아 관아에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같은 경우 남편을 관에 고발할 수 없었다. 남편은 부모나 마찬가지로 고발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간통죄의 형벌 뒤에 여성은 자녀안(恣女案)에 올랐다.126) 『고려사』 권84, 지38, 형법1 호혼 예종 3년. 이것은 경시안(京市案)이라고도 하며 경시안에 오른 자녀의 경우 간통 전에 낳은 자식은 6품관까지, 간통 뒤에 낳은 자식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127) 『고려사』 권95, 지29, 선거3 의종 6년 2월. 또 관직에 있는 남편이나 아들, 동생 등에게도 연좌가 미쳤다. 예컨대 이자겸의 여동생은 순종의 비였는데 순종 사후 궁노와 간통해 이자겸도 연좌되어 파면되었다.128)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간통이 쌍벌죄이긴 하였으나 여성에 대한 처벌이 보다 가혹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이 없는 경우에는 어떠하였을까? 아래의 사료를 보자.

(김혼은) 충렬왕 때 대장군이 되어 상장군 김문비와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그의 집에 가서 바둑을 두는데 문비의 처 박씨가 문틈으로 몰래 엿보고 혼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에 감탄하였다. 혼이 그 소리를 듣고 마침내 뜻을 두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문비가 죽고 혼의 처도 죽었다. 박씨가 사람을 보내어 청하기를 “첩은 아이가 없으니 그대의 아들 한 명을 얻어 기르기를 원하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직접 면대하여 할 말이 있으니 한 번 오시기를 바랍니다.”라 하였다. 혼이 마침내 가서 간통하니 감찰·중방이 글을 올려 끝까지 캐어 논하였다.129) 『고려사』 권103, 열전16, 제신 김경손 부 혼.

박씨 부인과 김혼(金琿, 1239∼1311)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둘이 실제로 관계를 시도한 것은 각자 배우자가 죽고 난 뒤였다. 즉, 배우자가 살아있을 때는 그에게 정절을 지켜야 하지만 배우자가 없으면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과부들의 적극적인 성애 추구가 많이 눈에 띤다. 예컨대 왕규(王珪, 1142∼1228)는 평장사 이지무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지무의 아들 세연이 김보당의 막내 사위라는 이유로 김보당의 난에 죽었다. 이의방은 왕규도 함께 해치려 수색하였는데, 왕규는 정중부(鄭仲夫, 1106∼1179)의 집에 숨어 화를 면하였다. 이때 과부가 된 정중부의 딸이 그를 보고는 좋아하여 간통하였고 왕규는 마침내 옛 아내를 버렸다.130) 『고려사』 권101, 열전14, 왕규.

또한, 미혼 여성의 사례도 보인다. 원 간섭기의 관리였던 허공(許珙, 1233∼1291)이 젊은 시절 달밤에 책을 읽고 있는데 그의 모습에 반해 이웃집 처녀가 담을 넘어온 사례가 있다.131) 『고려사』 권105, 열전18, 허공.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미혼 여성이나 과부는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는가? 김혼과 박씨는 귀양을 갔고, 왕규는 정중부 딸과의 혼인을 위해 이혼하였다. 즉, 두 사람의 관계가 혼인을 통해 합법화되어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미혼 남녀나 과부·홀아비가 자기들끼리 관계를 맺었다면 발각되더라도 문제를 삼아 처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난히 야외 행사가 많은 불교와 무속의 종교 의례 및 내외법이 없어 남녀노소가 어우러지던 명절 풍속을 생각하면 남녀가 사랑을 나눌 기회가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단오 때 그네를 밀고 당기다가, 혹은 탑돌이 하다가 눈이 맞은 남녀가 으슥한 곳에서 정을 통하는 일도 결코 드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처녀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재혼녀로서 왕비가 된 사례들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내외법이 없었다고 하여, 또 처녀성이 절대적이지 아않았다고 하여, 미혼자나 과부의 성이 개방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이 제대로 성애를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은 피임법이 보급된 근대 이후의 일이다. 성과 출산이 분리되지 않는 한 여성은 결코 성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지배층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당시에 딸은 혼인을 통해 다른 집안과 유대를 강화하고,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유지,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아무하고나 관계해 아이를 낳는 것은, 처녀성이 문제가 아니라 혈통의 순수성내지 혼인 전략이란 측면에서 도저히 용납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조차 중매없이 해모수와 관계한 딸 유화를 처벌하는 가부장의 존재가 나온다.

또한, 여성 스스로 과부로서 자유로운 성을 구가하기보다는 재혼하는 것을 선호하였을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여성은 어디까지나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만 사회적 존재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부는 전근대 시기 국가의 주 복지 대상이었던 환과고독(鰥寡孤獨) 중의 하나이다. 과부로 산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절대적인 가난과 주변인들의 끊임없는 성적 호기심 및 폭력의 대상이 됨을 의미하였다. 이들에게 선택 가능한 길은 죽은 남편의 아내로서 ○○부인이라는 직함을 계속 유지하며 정절을 지키든가, 아니면 새로운 남편을 만나 다시 그의 부인으로서 살아가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평생 혼인하지 않고 독신으로 산 여성의 존재도 보이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독신녀 요기 명의 “절조와 행실은 정결하여 흠이 없는 백옥과 같았네.”라는132) 김용선, 「왕재의 딸 왕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385. 구절이 이를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미혼이나 비혼 여성, 과부는 성적 욕망을 추구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혼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성의 경우는 부인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합법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들이 있었다. 첩과 기녀, 노비 등이 그들이다. 이는 동서고금에 공통되는 것이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오히려 반대쪽에 주목해 보자. 이 여성들, 즉 첩이나 기녀, 노비 등은 자유롭게 성애를 추구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남자의 요구에 의해 취하고 버려졌던 노리개였을 뿐, 자신이 사랑의 주도자가 될 수는 없었다. 우선 노비는 일상적으로 성적 수탈에 노출되어 있었다.

얼굴이 고운 노비는 주인의 침해를 받았고, 이 경우 질투에 불타는 주인 마님의 손에 죽기도 하였다. 예컨대 최충헌(崔忠獻, 1149∼ 1219)의 여종 동화(桐花)는 얼굴이 아름다워 마을 사람들이 많이 간통하였고, 최충헌 역시 그리하였다.133) 『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3 최충헌. 이의민(李義旼, ?∼1196)의 처는 남편과 관계한 노비를 때려죽였다.134) 『고려사』 권12, 열전41, 반역2 이의민. 또 남성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 기녀이다. 기녀, 특히 관기는 당시 여성들 중 가장 공부를 많이 한 부류였고, 미모와 시, 음률 등 여러 면에서 탁월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좋은 집 따님과 기생의 사이 / 그 마음 사이가 얼마나 다를까/ 가엾다 백주(柏舟)의 굳은 절개여 / 두 마음 안 품기로 맹세하였노니.”라는 시를 지어 절개를 지킬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고려가요 <동동>에는 바로 이런 기녀의 심정을 읊은 서글픈 구절이 보인다. “분지나무로 깎은 아! (임께) 차려드릴 소반 위의 젓가락 같구나 / 임의 앞에 들어 놓았더니, 손님이 가져다가 입에 물었나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녀들이나 일반 여성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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