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3. 성·신체·재생산
  • 출산은 경쟁력!
  • 1. 왕실
권순형

후비들에게 있어 출산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고려 왕실은 일부다처제였으므로 어떤 후비도 독점적 지위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후비는 왕실 내에서 적어도 1명 이상을 택하였고, 신하의 딸들 중 여러 정치적 고려를 통해 선발되었다. 제일 먼저 혼인한 왕실 출신의 후비가 제1비로서의 지위를 갖기도 하였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이후에 들어온 귀족의 딸과 지위가 역전되기도 하였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목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현종은 성종의 두 딸을 왕비로 맞아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현종의 첫 째 왕비 원정왕후(元貞王后) 김씨는 대부분의 후비들이 사후에 왕후 칭호를 받았음에 비해 처음부터 왕후로서 높은 지위를 가졌다.135)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원정왕후 김씨. 그러나 자식이 없었으며, 두 번째 왕후였던 원화왕후(元和王后) 역시 딸만 둘을 낳았다.136)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원화왕후 최씨. 그러나 김은부의 딸 원성태후는 2남 2녀를 낳았고 그 중 두 아들이 덕종과 정종으로 즉위하였으며, 딸은 배다른 형제와 혼인해 문종의 왕비(인평왕후)가 되었다. 원성태후는 처음에 연경원주(延慶院主)였다가 1022년(현종 13) 왕비가 되었으며, 1028년(현종 19) 죽은 뒤 시호를 원성왕후라 하고 현종의 사당에 합사하였다. 대부분 사당에 합사되는 것은 제1비였는데, 그녀는 제1비를 제치고 합사된 것이다. 아들 덕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를 왕태후로 추존하고 후에 용의공혜(容懿恭惠)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1056년(문종 10) 10월에 영목(英穆)이라는 시호를 주고, 후에 또 양덕(良德) 신절(信節) 순성(順聖)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137)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원성태후 김씨. 1140년(인종 18) 4월에는 자성(慈聖)이라는 시호를, 1253년(고종 40) 10월에는 광선(廣宣)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즉, 처음 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지위는 원성왕후에 비해 낮았으나 후손에 의해 크게 지위가 높아졌다고 하겠다.

김은부의 둘째딸인 원혜태후(元惠太后) 역시 2남 1녀를 낳아 아들이 문종으로 즉위하고, 딸이 배다른 형제인 덕종의 왕비(효사왕후)가 되었다. 처음에는 안복궁주(安福宮主)라고 불렀으나 사후 왕후 시호를 받고 문종 때 태후로 추존되었다.138)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원혜태후 김씨. 현종 사후 덕종·정종·문종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면서 안산 김씨는 크게 번영을 구가하였다. 이처럼 왕실 여성의 출산은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이며, 일족의 영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후비가 아들을 낳으면, 국가에서는 그녀에게 어떠한 대우를 하였는가? 또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그녀는 태후로서 어떤 지위를 누렸는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숙종비 명의태후 류씨(明毅太后 柳氏)의 사례이다. 태후는 정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류홍의 딸이었 고, 처음에 연덕궁주(延德宮主)라 칭하였다. 1097년(숙종 2)에 아들을 낳자 왕은 사신을 파견해 조서를 내리고, 은 그릇·비단·포목·곡식·안장과 말을 주고, 1099년 3월에 왕비로 봉하였다. 태후는 예종과 상당후 왕필 등 7명의 아들과 대녕궁주 등 4명의 딸을 낳았다.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의 존호를 올리고, 궁을 천화전(天和殿), 부를 숭명부(崇明府)라 하고, 생일을 지원절(至元節)이라 하였다. 1112년(예종 7) 태후가 사망하자 명의(明懿)라는 시호를 올리고, 숭릉(崇陵)에 장사지냈다. 이듬해 요나라에서 사신이 와 제문을 올리며 제사하였다. 1140년(인종 18) 4월에 유가(柔嘉)라는 시호를 추가하였고, 1253년(고종 40) 10월에 광혜(光惠)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139)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명의태후 류씨. 이처럼 후비가 아들을 낳으면 왕이 조서와 선물을 내리고, 또 대부분 궁주나 원주 등의 칭호를 가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특히, 첫아들일 경우는 ‘원자탄생하의(元子誕生賀儀)’라는 의례도 행하였다. 즉, 맏아들이 태어나면 왕은 사흘 동안 정무를 보지 않고 4일째 되는 날 대관전에서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는다. 7일째 되는 날 경령전에 고하고, 사신에게 조서와 예물을 주어 왕비의 궁에 파견하였다.140) 『고려사』 권65, 지19, 예7 원자탄생하의. 왕비는 이를 받고,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예물을 내렸다. 여타의 아들이나 딸일 경우는 사신만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원자탄생하의’는 중국에도 없는 의례로서, 의례 절차는 완전히 다르지만 요의 ‘하생황자의(賀生皇子儀)’를141) 『요사』 권53, 지22, 예6 嘉儀 하 하생황자의. 떠올리게 한다. 이는 특히 원자의 위상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고려나 요에서만 보이는 이유는 이들 왕실이 일부다처제였다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의례를 통해 원자가 뭇 아들들과 다름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그의 어머니가 여타의 후비들과 구별됨을 공식화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원자가 왕이 되면, 그녀는 태후가 되었다. 태후의 지위는 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명의 태후의 예에서 보듯 부를 설치하고 요속을 두었다. 또 그 탄신일을 기렸고, 외국 사절이나 상인이 공물 을 바치는 대상이 되었다.

물론 후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고 해서 폐비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려 왕실이 일부다처제였고, 자매가 함께 한 왕의 부인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 후대의 왕비들에 비해 출산 부담이 적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한 후비는 서열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고, 사후에도 쓸쓸하였다. 아래의 사례를 보자.

원목(元穆)왕후 서(徐)씨는 이천 사람이니 내사령(內史令) 서눌(訥)의 딸이다. 현종 13년 8월에 그를 맞아들여 숙비(淑妃)로 삼고 흥성궁주(興盛宮主)라고 불렀다. 현종 17년 3월에 그의 모친 최(崔)씨에게 이천군대부인 칭호를 추증하고 계모 정(鄭)씨에게 이천군(利川郡) 대군(大君) 칭호를 주었다. 문종 11년 5월에 죽으니 주관 관리가 고하기를 “예법에 의하면 아들이 있는 서모는 3개월간 시마복을 입는 법이나 흥성 궁주는 아들을 낳지 못하였으니 전하는 복을 입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더니 왕이 옳다는 교서를 내리고 정무만 3일간 정지하였다. 또 왕이 흥성궁주를 화장하라고 교시한 후 주관 관서에 명령하기를 유골을 매장하고 능을 설치하며 시위하는 관원들과 능 지키는 민호(守陵戶)를 정하여 두고 사시 명절에 제사를 받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중서성(中書省)에서 고하기를 “삼가 생각컨대 을미년 12월에 내리신 분부에 의하면 경흥원주 귀비(貴妃)는 문화대비(文和大妃)의 전례에 준하여 장례를 거행할 것이며 그 능호(陵號)는 그만두라고 교시하셨습니다. 흥성(興盛)과 경흥(景興)은 다 같이 선왕의 비(妃)인데 어버이를 추모하는 예로써 생각할 때 다르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물며 흥성궁주는 아드님도 없어서 전하께서 이미 상복도 입지 않으신 터이니 청컨대 능호를 그만두고 사시명절 제사도 그만두게 하십시오.”라고 청하였더니 왕이 그대로 하라고 교시하였으며 시호는 원목왕후라고 하였다.142)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원목왕후 서씨.

현종의 왕비였던 원목왕후는 아들없이 죽었다. 예법에 따르면 서 모의 복은 시마였지만 그녀가 아들이 없었기에 문종은 상복도 입지 않았다. 또한, 능호도 내리지 않고, 명절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고려의 후비들에게 자식, 특히 아들의 존재는 후비로서의 필수 사항은 아니었지만,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성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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