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3. 성·신체·재생산
  • 몸을 치장하라
권순형

고려시대에 육체적 아름다움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아름다움은 덕에 종속되는 개념이었을까? 성리학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몸은 예와 선을 실천하는 도구였다. 때문에 덕은 미를 뛰어넘는 절대적 가치였으며, 육체적 아름다움은 덕에 종속되었다. 중국 고대의 여성 교훈서였던 반소의 『여계』에는 여성의 용모에 대해 “부용(婦容)이란 얼굴이 아름답고 고운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세수를 깨끗이 하고, 의복을 정결하게 하며, 정기적으로 목욕을 하여 몸에 때를 없게 하는 것, 이것을 부용이라 한다.”고 하였다. 반면 불교에서 몸은 공(空)으로 고정된 실체도 아니며, 생로병사의 고통을 낳는 원천일 뿐이다. 부처가 되는 것이 이상이지만 이는 몸의 수양이 아니라 정신적 깨달음을 통한 것이다. 즉, 불교에서 몸과 깨달음은 별 상관이 없으며(탄트라파 제외), 따라서 육체적 아름다움에 덕이란 가치기준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일 뿐이다. 이를 반영하듯 후비를 묘사할 때 ‘덕 있는 외모’가 아니라 ‘덕과 용모’를 동시에 언급한다. 예컨대 “나의 백부 김억렴의 딸이 있는데 덕성과 용모가 다 아름답습니다.”거나151)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신성왕태후 김씨. “(예종의 경화왕후는) 용모와 태도가 현숙하고 아름다워서 왕이 매우 총애”하였다는152)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경화왕후 이씨.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의 여성들은 아름다운 용모를 자랑스럽게 과시하였다. 예컨대 철주(鐵州)의 수령 김정화(金鼎和)의 처는 처음에 그 지역 으로 들어올 때 자신의 미모를 믿고 몽수를 쓰지 않았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서북면에서 원종의 폐위 문제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은 김정화를 기둥에 묶고 그 앞에서 그녀를 강간하였다.153) 『고려사』 권130, 열전43, 반역4 최탄. 이는 불행한 일이나 어쨌든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자랑스러워하였고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원 간섭기가 되면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보다 노골화된다.

아래는 충선왕비인 순비 허씨(順妃 許氏, ?∼1335)의 묘지명 기사이다.

비(妃)는 아리땁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바탕이 선녀 같아서 달 아래 부는 옥퉁소가 진의 누대에서 우는 봉새를 감동시키고 물결에 일렁이는 비단 버선은 낙포에서 노는 용을 걸어오게 하듯 하였다. … 연꽃도 고운 자태를 양보하고 난초도 그 향기를 부끄러워하였다.154) 김용선, 「충선왕비 순비 허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p.814∼817.

후비의 묘지명이라면 유교적인 관점에서 쓰게 되므로, 그녀의 덕성에 대해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처럼 길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있다. 순비 허씨는 과부로서 충선왕과 재혼한 여성이다. 재혼 당시 이미 3남 4녀의 어머니였다는 점에서 아마도 그녀는 위의 묘사가 과장이 아닐 정도로 절세 미녀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라이벌이 있었으니, 바로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이다. 그녀는 충선왕이 아비의 후궁 무비(無比)를 죽이고 부왕을 위로하기 위해 들여 준 미모의 과부로서, 충렬왕 사후 다시 충선왕의 후비(숙비(淑妃))가 된 여성이다.155)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숙창원비 김씨. 두 왕비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의복과 옷차림으로 서로를 뽐냈다. 한 번은 연회 자리에서 두 왕비가 각기 다섯 번씩이나 의복을 갈아입으며 자태를 경쟁하였다.156)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순비 허씨. 숙비나 순비와 같은 사례가 보이는 것은 원 간섭기에 들어와 원 불교의 영향 등으로 성적으로 문란해지면서, 육체적 아름다움의 추구도 한층 노골화되었기 때문일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름다운 여성만큼이나 아름다운 남성도 각광을 받았다는 점이다. 인종 때의 관리였던 문공인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단아하고 곱게 생겨’ 귀족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원 간섭기의 학자 김태현은 생김새가 뛰어나고 단정하였으며 눈매가 그린 듯하였다. 선배 집에 있던 과부가 그에게 반해 시를 던지기도 하였다.157) 『고려사』 권110, 열전23, 김태현. 또한, 충선왕이 계국공주(薊國公主)와 사이가 좋지 않자 반대파들은 서흥후(瑞興侯) 왕전(琠王)에게 공주를 개가시키려고 책동하였다. 왕전은 외모가 아름다웠으므로 충렬왕은 그에게 좋은 의복으로 차려 입고 수차례 왕래해 공주의 눈에 띄도록 시켰다.158) 『고려사』 권89, 열전2, 후비2 계국대장공주.

이처럼 고려시대에 아름다움은 덕의 종속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생김새가 미인이었을까? “눈 같은 피부와 꽃 같은 얼굴,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눈썹, 곱고 어여쁜 자태는 하늘이 내려 준 모습이었네.”라는159) 김용선, 「왕재의 딸 왕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385. 글귀와 아래의 시가 이에 대해 시사점을 준다.

검은 머리, 흰 살결에 화장을 하고, 마음을 건네고 눈으로 맞으면 한 번 웃음에 나라를 기울게 한다 … 눈이 요염한 것은 칼날이라 하고, 눈썹이 굽은 것은 도끼라 하며, 두 볼이 통통한 것은 독약, 살결이 매끄러운 것은 보이지 않는 좀이라 한다.160) 『동국이상국집』 권20, 雜著 韻語 「色으로 깨우침」.

즉, 검은 머리, 눈 같이 희고 매끄러운 살결, 요염한 눈과 반달 같은 눈썹, 통통한 볼, 예쁜 미소, 화사한 얼굴, 고운 자태 등이 미인의 조건이었다. 몸매는 당나라 미인과 달리 날씬한 것을 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 시대의 미인이 그러하였으며, 원의 여성 복식도 전체적으로 길고 날씬한 실루엣을 보인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노국 공주나 조반 부인의 영정 모습 역시 그러하다.

고려시대에는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기녀는 물론 사대부가의 여성들도 일상적으로 화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이규보의 시를 보자.

나에게 어린 딸 하나 있는데

벌써 아빠 엄마 부를 줄 안다네

내 무릎에서 옷을 끌며 애교부리고

거울을 대하면 엄마 화장을 흉내낸다.161) 『동국이상국집』 권6, 고율시 「두 아이를 생각하다」.

즉, 어린아이가 엄마의 화장을 흉내 낼 정도로 사대부가 여성들은 늘 화장을 하였다. 그러나 계층에 따라 화장법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도경』의 귀부인 항목을 보면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을 넓게 그렸다.”고162)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귀부. 되어 있다. 그러나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백거이의 시를 인용해 “세속의 화장이 빨갛기만 할 뿐 수줍음이 없다.”고163) 『동국이상국전집』 권5, 고율시 「미인에게 농으로 주다」. 썼다. 즉, 기녀들의 화장은 붉은 색을 많이 쓴 한층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붉은 화장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유행하였다. 여성들이 목과 가슴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입술에는 연지, 볼에는 연지반점을 눈 아래까지 덧칠하였다. 그러나 송대에는 그러한 옷을 입지 않았고, 남송대가 되면 연지를 더 조심스럽게 발랐으며, 뺨은 약간만 붉게 하였다. 그리고 당대와 북송대 유행하던 짙게 칠해 윤곽이 선명한 눈 밑의 붉은 점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여성 생활이 보다 부자유스러워졌음과 관련될 것인데, 어쨌든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왔을 때인 인종 무렵 고려의 지배층 여성들은 송나라 여성들 이상으로 연지를 거의 쓰지 않은 얌전한 화장을 하 고 있었고, 시기가 좀 뒤이긴 하지만 기녀들은 여전히 당대의 적극적인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식은 어떠하였을까? 『고려도경』에 의하면 여성들은 흰모시로 만든 거의 남자와 같은 모양의 두루마기(袍)를 입었다. 그리고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쳐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하였다.164)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귀부. 치마는 두르는 형태로 8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해 부귀한 자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잇기도 하였다.165)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천사. 허리에는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을 달았으며, 비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를 찼는데 많은 것을 귀하게 여겼다.166)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귀부.

고려 여성의 복식의 특징은 우선 편안함이다. 넓은 두루마기와 풍성한 치마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일본의 기모노나 중국의 전족처럼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게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 주름을 많이 잡은 치마로 하체를 강조하고, 거기에 허리띠를 묶어 날씬해 보이게 하였다. 또한, 금방울과 향주머니로 움직일 때마다 향내와 방울소리가 나게 하여 한층 아름다움을 강조하였다.167)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귀부.

고려 여성 복식의 하나의 특색은 활동성이다. 넓은 바지는 조선시대에도 여성들이 말을 탈 때 입었다는 ‘말군’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치마가 두르는 형태였다는 점도 활동성을 부각시킨다.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이 특히 ‘두르는’ 치마임을 명시한 것은 이것이 중국의 여성 복식과 확실히 달랐기 때문이다. 고려의 기본 복식은 남녀 구분없이 저고리·바지·두루마기였으며, 치마는 그 위에 두르는 것이었다. 이는 삼국시대 이래 계속되었으며, 유목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여성도 남자처럼 바지와 저고리 위에 델(deel, 포)을 입었으나, 우리와 달리 포가 길고 좁거나 기마에 편리한 허리주름이 있는 것이었다. 요나 금 역시 폭이 좁고 길었다. 이들과 다른 우리 의복의 풍성함은 한편 중국의 영향으로 보인 다. 즉, 고려의 여성 의복은 한족 및 유목민의 특징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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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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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왕비와 부인은 다홍으로 말을 장식 하되 수레는 없었다.”는168)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2, 잡속1 여기. 데서, 고려시대 여성의 기본 교통 수단이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들은 말을 탈 때 몽수를 써 그 끝이 말 위를 덮었으며, 다시 그 위에 갓을 쓰고, 노복을 거느렸다.

부인의 머리는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 오른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았다.169)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천사. 머리에는 너울[蒙首]을 썼는데,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하였다.170)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귀부. 관리의 첩이나 백성의 처 등은 힘든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않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 올렸으며,171)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비첩. 가난한 집에서는 그 값이 은 1근이나 될 정도로 비싸서 그것을 쓸 수 없었다.172)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천사. 너울은 반투명의 검은색 얇은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었지만 후대의 장옷이나 쓰개치마와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이것을 쓰는 게 의무가 아니었고, 쓰지 않는다고 처벌받는 것도 아니었다. 또 늘어뜨리지 않고 정수리에 접어 올릴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몽수는 패션이나 햇빛 차단 등 다양한 용도가 있었다 하겠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복식도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와 다름없는 넓은 두루마기나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繩]로 대신할 뿐”이라는 기사,173)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0, 부인 여자. 그리고 부인이나 여승이 다 남자의 절을 하였다는174)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2, 잡속1 잡속. 것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혼인 뒤에도 부모를 모실 수 있고, 재산 상속과 제사 등에서 아들과 다름없었던 고려 여성의 존재 형 태를 떠올리게도 한다. 복식의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의 여성은 후대에 비해 보다 활달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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