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1 예와 수신으로 정의된 몸
  • 03. 조선 사회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
  • 가계를 계승하는 몸, 아들 낳는 몸
김언순

유교는 사회 구성의 중심 원리로 효를 강조하였다. 가정을 사회의 기초로 삼는 유교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맹자는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뿐이라고 단언하였으며,209) 『孟子』 「告子章句下」, “堯舜之道 孝悌而已矣.” 특히, 순의 효에 대해 매우 상세히 자주 언급하였다. 효를 강조한 맹자는 가장 큰 불효로 후손이 없는 것을 들었다.210) 『孟子』 「離婁章句上」, “孟子曰 不孝有三 無後爲大.” 유교 사회에서 대를 잇는 것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근간으로서 최고의 덕목인 효의 실천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는데,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으면 초상을 치르고, 초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도리를 스스로 다하고 밖에서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 것을 혼례라고 하였다.211) 『禮記』 「祭統」, “孝子之事親也 有三道焉 生則養 沒則喪 喪畢則祭 養則觀其順也 喪則觀其哀也 祭則觀其敬而時也 盡此三道者 孝子之行也 旣內自盡 又外求助 昏禮是也.” 혼례를 모든 예의 근원으로 삼는 이유 도 바로 사회 존속의 핵심 장치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강조하는 것은 가문의 영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계승할 자식이 없는 것[無後]을 가장 큰 불효로 간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 때 가문을 계승하는 것은 아들에게만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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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경릉(서오릉)
소혜왕후 경릉(서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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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여성이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도 효의 실천이지만,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 중심적인 역할이 된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간주되어 내쫓기기도 하였다. 『소학』을 통해 조선에 소개된 칠거지악은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의 『내훈』에도 수용되어, 조선 여성의 삶을 지배하는 담론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의 아내 자리가 반드시 불안하였던 것은 아니다. 양자를 들여 후사를 해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입후(入後)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아들 낳기를 원하였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가 지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태아의 성별을 구별하는 법과 태아를 여자에서 남자로 만드는 법이 여러 가지 실려 있다.

3개월이 채 못 되어 한밤 중 삼경(三更)에 남이 알지 못하게 자기 남편의 갓을 쓰고 옷을 입고서 홀로 집안 우물가에 가서 왼쪽으로 세 번 돌고 나서 빌기를, “남위양 여위음(男爲陽女爲陰)”이라 세 번 하고, 우물을 굽어 스스로 자기 그림자를 비치고, 돌아올 적에는 돌아다보지 않으면 필경 아들을 낳는다. 박물지에 보면, 진성이가 연달아 딸을 열명을 낳고 나서 이 방법대로 하게 해서 아들을 낳았다.212) 빙허각, 권지삼․이민수 역,『규합총서』, 기린원, 1988, pp.231∼232.

빙허각은 글 말미에 이런 방책을 쓴다고 해서 여태가 남태로 바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의서(醫書)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고, 또한 시 속에서도 경험한 자가 있기 때문에 기록한다고 쓰고 있다. 한글로 된 『규합총서』는 생활지침서로서 널리 읽혔는데, 아들 낳는 비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조선 여성들에게 아들을 낳는 일이 얼마나 절실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들은 쉽게 내쫓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아들 잘 낳는 여성의 몸이 선호되기도 하였다.

여성의 출산 능력은 가계 계승자로서의 자부심을 갖는 원천이 되었지만, 아들을 낳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남아선호 풍조를 확산시켰으며, 딸은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결국 여성의 몸은 아들을 낳을 때만 출산 능력이 긍정되었으며, 딸을 낳았을 때는 동일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남아선호 사상은 여성을 더욱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갔다.

한편, 아들 낳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태교였다. 태교는 인간 교육의 출발점으로 인식되었으며, 여성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수신의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성인됨의 출발이 어머니의 태교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열녀전』에 소개된 태임의 태교에 근거하고 있다. 태임은 아들 문왕을 임신하였을 때 태교 를 잘하였으며, 그 결과 문왕이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태임이 성인으로 추앙받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아들 문왕을 임신하였을 때 태교를 잘 해서 문왕이 성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태임의 태교에 대한 내용은 『소학』 입교편 첫머리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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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1809)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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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전』에 말하기를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배면 기울게 잠자지 않으며, 가장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설 때에 외발로 서지 않고, 사특한 맛이 나는 것을 먹지 않았으며, 자른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먹지 않고, 좌석이 반듯하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눈으로는 사특한 빛깔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밤에는 소경으로 하여금 시를 낭송하게 하였으며, 올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자식을 낳으면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다.”고 하였다.213) 『小學』 「入敎第一」, “列女傳曰 古者 婦人妊子 寢不側 坐不邊 立不蹕 不食邪味 割不正不食 席不正不坐 目不視邪色 耳不聽淫聲 夜則令瞽誦詩 道正事 如此則生子 形容端正 才過人矣.”

태교는 뱃속의 아이를 위한 교육이지만, 태교의 주체인 산모가 바른 마음과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수신의 성격을 갖는다.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는 『태교신기』에서 태교를 수신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214) 정해은은 사주당이 태교에 성리학적 가치인 ‘수신’의 성격을 부여하였다고 보았다(정해은, 「조선시대 태교 담론에서 바라본 이사주당의 태교론」, 『여성과 역사』 10, 2009). 조선 여성들은 평소에도 바른 마음과 몸가짐을 수신의 주요 내용으로 삼았으나, 임신 후에는 태교차원에서 각별히 더욱 신경을 썼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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