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2 출산하는 몸
  • 01. 어머니의 조건
  • 혈통 또는 신분의 중요성
이순구

조선시대 여성의 몸은 무엇보다 출산하는 주체로서 의미가 컸다. 남자는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여자는 출산과 육아를 책임지는 것이 일반적인 구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출산의 주체인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사람이어야 하였을까?

어머니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어머니의 혈통이다. 조선에서 신분을 결정짓는 데 어머니 혈통의 영향력이 컸다. 이른바 ‘종모법(從母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정도로 어머니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였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아버지가 양반이라고 해서 그 자식이 모두 양반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중국에서 아버지 신분이 자식들에게 대체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에서는 아버지가 비록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적처(嫡妻)이며 또 양반이어야지만 자식이 온전한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적처가 아니거나 또 양반이 아니라면 자식은 양반이 된다 하더라도 제약이 많은 양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선의 현실에서는 양 반 남자가 ‘양반이 아닌 여자’를 적처로 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어머니가 적처가 아닌 경우는 많았다. 그럴 때 그 자식은 서얼이 된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은 홍길동의 어머니가 노비였고 홍길동이 종모법을 적용받아 얼자(孽子)였기 때문이다. 물론 홍길동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속량이 됐을 것이고 그래서 노비로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결국 제약이 많은 서얼 신분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 이들 서얼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과거에서 문과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서얼 자손은 문과,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못한다.”는 『경국대전』 예전 제과(諸科) 조항은 서얼들에게 악법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길이 과거로 통하는 조선에서 그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문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상 그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현실적으로 조선 사회에서 문과를 볼 수 없는 양반이란 더 이상 양반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양반 남성으로서는 당연히 양반 여성으로서 적처를 삼고 거기에서 자식을 얻고자 하였을 것이다. 양반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는 서얼로 집안을 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719년 10월 26일 권상일(1679∼1759)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풍산의 이씨 장인 댁에 가서 소실(小室)을 취하였다.”247) 『청대일기』 기해년 10월 26일. 『淸臺日記』는 영남의 학자관료 권상일이 58년간 쓴 일기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3년 탈초하여 2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데이타베이스에서 내용을 검색해 볼 수 있다. 첩을 들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단지 한 줄에 불과하다. 별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읽힌다. 권상일은 이 당시 41세로서 과거에 급제한 지 10년 가까이 됐으며 관직이 예조 낭관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한마디로 혁혁한 양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혁혁한 양반은 불행히도 부인을 3번이나 잃고 어린 두 아들만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부인의 손길이 절실한데, 그러나 또 정식으로 혼인해서 4번째 부인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할 수 없이 소실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적처가 있으면서 소실을 두는 것은 남자들에게 꽤 큰 즐거움으로 보이지만, 적처없이 소실만 있게 되는 것은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권상일은 소실 들이는 일이 그다지 탐탁하지 않은 듯 결국 그 일을 적되 한 줄로 요약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권상일의 소실에 태도를 통해 양반 남성들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양반 남성들에게 첩은 적처가 엄연히 존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적처가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초라한 느낌마저 주는 것 같다. 말하자면 첩이란 여유로 두고 싶을 때 두어야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요약해 본다면 양반 남성들에게는 반듯한 양반 여성을 적처로 삼고 거기에서 자식을 얻는 것이 일단 가장 중요하였을 것이다. 권상일의 경우, 적처 소생은 끊임없이 과거 공부를 한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데, 그렇더라도 과거 공부는 계속된다. 양반집 남성이라면 결과가 없더라도 평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과거이기 때문이다. 이 분위기는 권상일의 적손자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소실에게서 난 아들은 늘 서아(庶兒)라고 불리며 온갖 집안일을 한다. “서아가 나무 베는 일로 노비 셋을 데리고 천주, 대승 등 처에 갔다.” “서아로 제사를 대신 지내게 하였다.”와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서자들은 비록 실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끝내 그 집안의 대표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양반 남성들은 서자가 아닌 적자를 낳아줄 수 있는 정식 부인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 요구하는 이상적인 가족 구성을 위해서는 신분이 훌륭한 적처의 존재가 절대적으 로 필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서얼을 구분짓는 가족 구조를 갖게 된 것일까? 왜 적처가 아닌 사람의 아들들을 서얼로 차별화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도 여기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적처와 그 집안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적처의 입장에서는 내가 낳지 않은 자식이 내 자식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이 유교적 제도의 도입으로 적처의 위치를 보장하자 여성들은 누구나 적처가 되고 싶어 하였으며 적처가 된 후에는 그 지위를 배타적으로 누리고자 하였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혼인에서 남성 집안과 여성 집안이 대사회적인 공조를 함께 하면서 비교적 대등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248) 「올바른 혼인」,『혼인과 연애의 풍속도』, 국사편찬위원회, 2005에서 조선 혼인의 특성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여성 집안은 자신의 집안의 권리를 다른 여성 집안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배타적 권리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여성 집안과의 사회적인 공조를 의식해야 하는 남자 집안으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적처와 그 자식들의 권리는 커지고 적처의 자식이 아닌 서얼들의 권리는 훨씬 더 제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적자들은 가계 계승이나 재산 상속에서 절대 우위를 점할 뿐만 아니라 양반에게 가장 중요한 과거에서도 서얼들은 배제시켜 나갔다.

조선에서 서얼에게 문과 응시 자격 제한이 있는 한, 적처들의 지위는 점점 더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의 신분이나 혈통의 중요성도 지속됐다. 조선에서는 양반 어머니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양반 신분이어야 한다는 점과 또 적처라는 위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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