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2 출산하는 몸
  • 04. 출산의 대체, 양자들이기
이순구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지만, 모든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임신 자체를 못하거나 또는 출산을 하였으나 모두 일찍 죽었을 경우, 아니면 딸만 낳았을 때 여자들은 대안을 마련해야 하였다. 조선에서 가계 계승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였고 일차적인 책임은 여자들에게 있었다. 흔히 ‘칠거지악(七去之惡)’에 ‘무자(無子)’가 포함돼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여자들이 자식을 낳지 못할 때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하였을 때 모두 칠거지악으로 쫓겨났을까? 여자를 내보내는 것은 남자 쪽 집안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부인을 쫓아내면 일단 집안에 적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집안에 적처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불균형을 의미한다. 핵심 가정 관리자가 없는 것이며, 나아가서 가문 유지의 동반자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남자 집안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물론 새로운 부인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된다. 남자 쪽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이익인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 을 것이다.

부인을 내보낸다는 것은 곧 적처의 집안과의 관계도 해소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또 무슨 문제가 없을까? 조선시대 혼인에서 적처의 집안, 즉 여자 집안의 영향력은 컸다. 앞에서 어머니 혈통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누누이 얘기한 바 있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혼인에서의 양가 결합이 부계 주도적이지 않았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남자가 장가를 드는 혼인 형태였기 때문에 남자 집안과 여자 집안은 비교적 대등하게 만나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의 관계였다. 후기로 가면서 혼인이 시집살이로 바뀌고 남자 쪽이 주도권을 갖게 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여자 집안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식의 신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또는 정치적으로 후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 집안과의 공조를 해소한다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론 새로운 집안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형성한 네트워크를 능가할 정도의 이익을 과연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어차피 여자 집안과의 공조 관계가 불가피한 사회라면, 남자 집안은 가능하면 처음 맺은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면서 사회적으로 공동 이익을 함께 얻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남자 집안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를 내쫓기보다는 다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부인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다른 방법을 찾는 것 말이다. 그것에 적합한 것이 바로 입후(立後), 즉 양자들이기라고 할 수 있다.

양자들이기는 국가의 정책하고도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양반들의 이혼을 원치 않았다. 사회 통합에 가족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가족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부부관계가 원만해야 한다. 조선 후기에 국가는 현실적으로 이혼을 거의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자 집 안들은 아들이 없을 때 부부관계는 유지하면서 입후라는 대체 방법을 쓰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아들을 못 낳아서 칠거지악으로 쫓겨난 여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양자를 들인 집안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양자들이기는 양반가에서는 안 하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장성에 사는 유학 김명길의 소지(所志)에 동성 사촌 윤길이 적첩구무자(嫡妾具無子)하여 동성 6촌 동생 중옥의 둘째 아들 하현으로 계후를 삼고자 하여 양쪽 집안이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옥 부처가 모두 죽고 없어 상규에 구애됨이 있어 예조의 허락을 받을 수 없으니 이 일을 아뢰는 바입니다. 무릇 입후는 근거가 명확하나 아뢰기 어려울 때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논리를 기록하게 하는 것이 정식이 돼 있습니다. 가문의 어른인 명길의 호소가 이와 같으니 정식에 의거해 김중옥의 둘째 아들 하현을 윤길의 후사로 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이 허락하였다.259) 『승정원일기』 2053책, 순조 14년 12월 22일 무인. 탈초본 107책 1814년 嘉慶 19년. 『승정원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승정원일기 웹서비스 http://sjw.history.go.kr/main/main.jsp에서 인용하였다.

순조 14년(1814) 예조에서 올린 입후 관련 글이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이와 같은 입후 관련 기록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반민에 대한 기록으로는 아마도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 후기 입후가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조선에서 여자들의 역할 중에 임신과 출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으로 컸다. 그러나 여자들은 자식을 못 낳는다고 해서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양자들이기라는 유용한 출산 대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대체법이 있다고 해서 여자들이 출산 자체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가능하면 여자들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집안을 이어가기를 원하였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였다. 실자(實子)에 의해 가계가 계승될 때 자신의 위치가 가장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자가 없을 경우에도 조선의 여자들은 ‘양자들이기’라는 방법을 통해 실자 부재의 출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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