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2. 주인의 손발로 살아가다
  • 집안에서 하는 일
  • 1. 몸종과 유모
이성임

‘시중’이란 주인의 곁에 항상 대령하면서 갖가지 부림에 응하는 것을, ‘수행’은 주인의 원근의 출타에 배행하는 것을 말한다.264) 이하는 池承鍾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朝鮮前期 奴婢身分硏究』, 一潮閣, 1995, pp.175∼212). 시중은 집안에서 수행은 집밖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하지만 주인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수족으로 역할을 다한다는 점에서 본질적 내용은 동일하다. 또한, 수행도 가내의 시 중이 가외까지 연장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노비의 존재가 필수였으며, 양반은 이들이 없으면 생활에 커다란 불편을 겪었다. 시중을 드는 노비는 주인의 수족으로 바로 눈 앞에서 부린다 하여 안전사환노비(眼前使喚奴婢)라 하였다. 안전사환노비는 노비 수요 규모가 허락하는 한 주인의 개별적 구성원들에게 배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 누구의 안전사환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바로서 이를 통해 안전사환이 그때그때 임의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고정된 노비를 두고 그에게 부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내사환을 배정함에 있어 주인 남자에게는 남노와 여비가 모두 가능하였지만, 주인 여자에게는 가능한 한 동성인 여비로 제한하였다. 이는 “사족 부인으로 조금 가법(家法)이 있는 자는 평생 동안 남노(男奴)가 그 목소리와 얼굴을 듣고 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265) 宋寅, 『頤庵遺稿』권9, 禮說, 反哭條. 송인(宋寅)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흔히 풍자되는 마님과 돌쇠는 존재하기 어려웠다.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 방과 뜰을 청소하고 주인의 세수 준비를 하며, 주인이 일어나면 곁에 대령하여 부림에 응할 태세를 갖춤으로서 주인의 일과가 순조롭게 시작되도록 하는 것이 가내사환의 임무였다. 즉, 이불 깔기와 개기, 요강 부시기, 방청소, 세수 시중 등 온갖 잡다한 일뿐만 아니라 밖에 나갈 때 동행을 하는 등 모든 일을 주인과 함께 하였다. 또한, 이들 몸종은 여자 주인이 혼인할 때 신비(新婢)로 배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 신부는 자신이 부리던 몸종과 동행함으로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신노비(新奴婢)는 혼인할 때 지급되던 별급 노비로 신랑에게는 남노가 신부에게는 여비가 지급되었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손자 광선(光先)이 혼인할 때 유희춘은 광선에게 대소 2쌍의 노(대자: 雙 是, 丙辰 소자: 石伊, 末石)를 지급하였다.266) 『미암일기』 1573년 8월 26일조. 이 중 소자는 광선의 시중을 들고 대자는 마부 역할을 담당되었다. 이로 보아 광선의 처도 같은 규모의 비를 지급 받아 몸종과 유모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들 안전사환노비의 사환 시기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이들은 대개 ‘어린 것’ ‘어렸을 때’ ‘동노(童奴)’ 등으로 불리고 있어, 성년이 되기 이전부터 사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노비의 사환에 별다른 규제가 없어 사환 시기는 주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다. 실록에는 11세부터 주인으로부터 사환되던 노비가 확인되고, 이천년(李千年)을 시봉하던 소노의 나이는 13∼14세 가량이었다. 오희문(吳希文, 1539∼1613) 가의 노 막정(莫丁)도 14세부터 붙잡혀 와서 사환되었다.267) 『쇄미록』 1595년 12월 8일조. 즉, 이들은 공노비의 사환이 시작되는 16세 이전부터 사환되는데, 시중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가능하였다.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에는 어머니의 안전사환비 서대(西代)가 등장한다. 다음 자료를 통하여 시중의 역할과 주인과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서비는 10살이 되기 전에 어머님이 데리고 왔다. 안전사환이라하여 잠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가사(家事)를 처리함에 부지런하였고 유무(有無)를 교역(交易)함에 자못 능란하여 의지함이 실로 많았다. 지금 난리를 만나 온갖 어려움을 다 겪어도 또한 잠시도 떠나지 않고, 남쪽 바닷가에 내려와 머물 때에도 따라와 함께 살다가 뜻하지 않게 구원이 미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죽으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이 때문에, 어머님이 상심하고 애통해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으시고 음식 드시는 것도 갑자기 줄어, 기색이 평안치 않으시다 하니 염려됨을 이기지 못하겠다.268) 『쇄미록』 1593년 11월 4일조.

1593년(선조 21) 11월 4일 오희문은 서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서대는 오희문의 어머니가 혼인 시에 지급받은 신비로 모친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으며 평생 시중을 들었다. 서대가 병사하였다고 하자 어머니가 진실로 애석해 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노비의 상실에 따른 애석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오희문의 누이 심매(沈妹, 심씨에게 출가한 여동생)에게는 만화(萬花)라는 안전사환비가 있었다. 오희문은 1595년(선조 23) 2월 피란지 임천에서 우연히 만화의 방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심설가(沈說家)의 비 만화가 길 가다가 우리 가족이 여기 우거(寓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들어왔다. 뜻 밖에 만나게 되니 매우 기쁘다. 이 비는 어릴 때의 안전사환이며, 우리 집에서 자랐다. 누이는 자기 소생 같이 사랑하였다. 누이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심(沈)이 작첩하여 거느렸고 아이를 둘 낳았다. 심(沈)이 또한 죽은 뒤에는 낙안(樂安)으로 내려가 다른 부(夫)에게 시집가서 살았다.269) 『쇄미록』 1595년 2월 30일조.

만화가 오희문 집안에 여비로 들어오게 된 경위는 파악할 수 없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오씨 가에 들어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만화는 심매의 안전사환으로 배정되어 같이 자랐으며, 신매가 혼인할 때 신노비로 지급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심매가 만화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러나 심매가 죽은 뒤 만화는 매제 심설(沈說)이 첩으로 삼아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심설이 죽은 뒤에는 낙안으로 내려가 다시 시집갔다. 어쨌든 만화는 피란길에 옛 주인집의 소식에 접하자 굳이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그를 만난 오희문은 매우 기뻐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 여성은 출산 이후 아이를 직접 기르지 않았으며, 이러한 일은 유모가 담당하였다. 유모는 법전에서 규제하던 사치 노비로 일반 사대부가에서 혼인 시에 지급하였다. 유모는 아이의 성격 형성과 유아 교육까지 감안하여 신중하게 선정되었다. 수유 기간이 지난 뒤에도 양육과 관련된 역할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유모가 되면 가내 사환에서 제외될 뿐만 아니라 주인집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유모는 주인의 자녀를 양육함에 은공(恩功)이 인정되어 주인으로부터 특별히 기억되고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유희춘도 자신을 키워 준 유모 강아지(强阿只)가 71세로 죽자 어렸을 때 안아주고 업어주던 정을 기억하였다.270) 『미암일기』 1574년 9월 12일조.

이미 자신의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주인집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아이에게 화가 미칠 수도 있다. 이는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黙齋日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271) 이하는 안승준과 이혜정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안승준, 『조선 전기 私奴婢의 사회적 성격』, 경인문화사, 2007, pp.118∼121 ; 李蕙汀, 「16세기 가내사환노비의 同類意識과 저항-『黙齋日記』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54, 2010). 이문건은 손자 숙길(淑吉)이 출생하자 유모를 선정한다. 이는 마을의 점장이 김자수(金自粹)가 친어머니가 양육하는 것보다는 유모가 기르는 것이 좋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문건이 유모를 선정하는 중요한 조건은 출산하여 젖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모 대상자는 눌질개(訥叱介)와 춘비(春非)였다. 눌질개의 혼인여부는 알 수 없지만, 춘비는 남편 방실(方失)과 검동(撿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문건은 이 중에 눌질개를 유모로 삼았다. 그녀가 젖의 양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눌질개는 유모직을 맡은 지 닷새 만에 젖이 나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제외시켜 달라고 하였다. 이에 이문건은 눌질개가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마음껏 먹일 수 없자 핑계를 댄다고 생각하지만, 할 수 없이 교체하였다. 이에 춘비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춘비를 고려하였지만 젖의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사나워 제외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춘비는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춘비가 숙길을 부지런히 돌보아 울리지 않자 이문건은 매우 고맙게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춘비는 병을 얻는다. 일기에는 7월 10일 춘비가 왼쪽 겨드랑이에 종기가 나서 2달 가까이 고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춘비가 앓는 동안 이문건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 를 살려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춘비는 9월 8일 마침내 숨을 거둔다. 더욱 불행한 것은 춘비가 죽기 한 달 전에 아들 검동이가 먼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이문건은 그 어미의 젖이 상해서 죽었다고 하였다.272) 『묵재일기』 1551년 8월 14일조. 아마 춘비가 병을 앓는 상황에서 검동이에게 계속 젖을 먹였고, 이것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검동이가 죽은 다음날 아비 방실은 빈 상자 하나를 마련하여 죽은 아들을 묻어 주었다.273) 『묵재일기』 1551년 8월 15일조.

그러면 이제 숙길은 어찌 되었을까? 이문건은 잠시 돌금(乭金)으로 하여금 젖을 먹이게 하였으나274) 『묵재일기』 1551년 9월 26일조. 이문건 가에서는 또 다른 비가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비 주지(注之)가 9월 15일 산고 끝에 아들을 낳았다.275) 『묵재일기』 1551년 9월 15일조. 이에 이문건은 주지로 하여금 숙길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276) 『묵재일기』 1551년 9월 24일조. 주지의 아들이 태어난 지 보름도 안 되어 죽자277) 『묵재일기』 1551년 9월 28일조. 주지는 이제 숙길 만을 돌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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