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2. 주인의 손발로 살아가다
  • 집안에서 하는 일
  • 2. 취사와 방아 찧기
이성임

밥 짓고 상 차리는 부엌일은 여자의 역할이므로 노비가 없을 경우에는 사족 부녀가 하기도 하지만, 여비가 맡아서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따라서 부엌일이나 밥짓기 담당 여비를 주비(廚婢)·취비(炊婢)라 불렀다.

노비를 보유한 정상적인 상황에서 사족 부녀들이 몸소 부엌일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278) 이하는 지승종, 앞의 책, pp.212∼222.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밥짓기 담당할 사람이 없는 가난한 누이에게 여비를 주었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화로 전해온다.279) 金誠一, 『鶴峯集』 附錄3, 神道碑銘. 이는 사족 부녀도 여비가 전혀 없다면 몸소 부엌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희춘도 밥짓고 물 긷는 여비가 없는 첩의 처지를 매우 가련하게 생각하여 여비 한 명을 붙여준 바 있다.280) 『미암일기』 1569년 11월 1일.

오희문 가에는 밥 짓기를 담당하던 강춘(江春)이라는 여비가 있었다. 강춘은 피란 중에도 오희문을 따라 와 부엌 일을 담당하였다. 한번은 강춘이 병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한 쪽 발에 종기가 나서 운신을 못하였다. 밥 지을 사람이 없자 이 일을 어둔(於屯)이라는 여비가 대신하였다. 그런데 어둔은 음식을 훔쳐 먹고 정갈하지 못하여 오희문의 심기가 불편하였다.281) 『쇄미록』 1594년 8월 17일조. 강춘은 다시 허리 아래의 상처가 심하여 운신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는 다른 여비들도 병 중에 있어 하는 수 없이 다른 집의 여비를 빌려 와 밥을 짓게 하였다.282) 『쇄미록』 1598년 4월 2일조.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8월에 오희문은 서울에 체류 중이던 강춘의 병세가 위중하여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대해 그는 강춘이 어릴 때부터 가내에서 자라서 오로지 아침저녁 밥 짓는 일을 맡아왔던 것을 기억하며, 타향에서 죽게 되어 가련하다는 동정심을 표하였다.283) 『쇄미록』 1599년 8월 16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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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1538∼1593) 묘방석
학봉 김성일(1538∼1593) 묘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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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의 비 강춘의 사례에서 보듯이 밥짓기를 전담하는 여비가 있었으며, 이 취비의 상실은 주인에게 상당한 불편을 가져다 주었다. 여비가 없으면 다른 집의 여비를 빌려다 사용할 정도로 사족 부인은 부엌일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절구 또는 방아를 이용해서 곡식을 찧는 것도 여비가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아를 찧어 쌀·보리의 껍질을 벗겨내야 하였다.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조선의 사정을 묻는 중국 사신의 질문에 “천자(賤者) 또한 농사짓는 일과 물 긷고 절구질하는 일[井臼]에 종사하는 자가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284) 奇大升, 『高峯集』 續集2, 雜著. 절구질은 가사 노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정도로 노비의 전형적인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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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 찧기는 여비들이 담당한 가장 기본적인 노역이었다. 평소 집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금을 내기 위해서 10∼20명에게 곡식을 찧어 바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285) 김용만, 앞의 책, pp.61∼63.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시 가운데 조밭[秫田]에 봄이 오면 노가 먼저 씨 뿌리고, 좁쌀[粟米]은 아침 되면 비가 절로 찧는다.”286) 徐居正, 『四佳集』詩集8, 村居. 시에서 곡식을 찧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여비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의 시에 “어린 비가 보리를 가지고 이웃집에 절구를 빌려 찧으러 갔다. 그 집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말을 먹이려느냐. 보리를 찧어 무엇 하리’ 하면서 크게 웃었다. 비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왔다.”고287) 李好閔, 『五峯集』 2. 한 것은 자신의 가난한 살림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방아 찧기가 결국 여비의 일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시에서 찧은 쌀을 말리고 닭이 쪼아 먹는 것을 몽둥이로 쫓아 보내는 사람은 모두 여비였으며,288) 金正國, 『思齋集』 4, 摭言. 서거정의 시에서 밤에 빗소리를 듣고 졸다가 깨어나 뜰 가운데 햇볕에 말린 보리가 떠내려간 것을 보고 미친 듯이 황급히 달려 나가는 것도 여비였다.289) 徐居正, 『四佳集』 詩集 13, 是夜大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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