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2. 주인의 손발로 살아가다
  • 생산 노동 종사
  • 1. 양잠과 길쌈
이성임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한다.’라는 말과 같이 길쌈은 여비의 중요한 생산 활동 중의 하나였다. 여비가 생산한 비단·면포·마포 등은 의복의 재료로서 활용되는가 하면 세금을 내는 재원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양잠은 국가적으로 적극 권장하는 사업으로 왕후가 내·외명부를 인솔하여 직접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하기도 하였다.290) 이순구, 「조선 초기 여성의 생산노동」, 『國史館論叢』 49, 1993, pp.82∼84.

성주에 유배 중인 이문건 가에서도 부인의 주도 하에 양잠이 진행되었다.291) 이하는 남미혜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조선시대 양잠업연구』, 지식산업사, 2009, pp.132∼166). 양잠은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누에는 알 → 애벌레 → 번데기 → 나방의 단계를 모두 거쳐 완전 탈바꿈하는 곤충으로 알의 상태로 겨울을 난다. 그리고 봄에 뽕잎이 피는 시기가 되면 누에알에서 애벌레가 부화 해 뽕잎을 먹이로 하여 성장해 고치를 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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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건 가에서는 1547년(명종 2)부터 양잠을 시작하여 1564년(명종 19)까지 안정적으로 양잠을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잠종을 멀리 평안도 성천·개천에서 구해 왔으나 다음 해부터는 잠종을 채취하여 겨울을 나는 기술을 보유하였다. 이문건 가에 독립된 잠실이 없으므로 양잠은 가족들이 거주하던 하가(下家)에서 이루어졌다.292) 당시 이문건가의 거주형태는 上堂과 下家로 되어 있었는데, 상당에서는 주로 이문건이 거주하고 하가에서는 이문건가의 상하식솔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 자라기 시작하여 섶에 오르면 가족들이 생활공간이 부족하여 이문건이 거주하는 곳으로 올라왔다. 뽕잎을 먹이는 철이 되면 노비의 일은 자연스럽게 나뉘어 뽕잎 채취에는 남노가 동원되었고, 뽕잎을 주고 고치를 따고 길쌈하는 일은 여비가 담당하였다. 남노는 집 근처의 뽕나무에서 뽕잎을 채 취해 오지만 여의치 않을 때에는 산에서 채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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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수확한 다음 바로 길쌈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방이 생겨 상품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문건 가에서는 고치 수확 후 다음 해 사용할 종자를 선별하여 누에씨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명주실과 솜으로 가공하였다. 고치를 수확한 후 고치를 풀어 견사를 뽑는데 이러한 방적 과정은 부인의 주도 하에 며느리·여비 등 집안의 모든 여성이 동원되었다. 이 때에 집안은 방적 과정에서 나오는 연기로 꽉 차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문건 가에서는 좋은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을에 수주사(水紬絲)를 뽑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방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수주사는 수화주(水禾紬)라고도 하는데 이는 최상급의 비단으로 보통의 명주[常紬]보다 몇 배의 가치를 갖는다.

이문건 가에서 생산한 명주는 먼저 의복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명주로 중치막이나 저고리·바지·외출복 등을 만들거나 솜을 만들어 이불을 만들거나 솜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 명주실로 거문고줄을 매는가 하면 질이 떨어질 경우 그물을 엮기도 하였다. 또한, 명주는 성주 지역의 공물(貢物) 중 하나로 세금으로 납부되었다. 공물은 지역의 물산을 현물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성주에서는 명주가 공물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각 호의 민인들은 명주를 직접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든가, 여의치 않으면 쌀로 명주 값을 대신 납부하기도 하였다.293) 이성임, 「16세기 지방 군현의 貢物分定과 수취 -경상도 星州를 대상으로」, 『역사와 현실』 72, 2009.

하층 여성의 하루는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곡식 찧고, 밥 하 고, 물긷고, 바느질하고, 빨래하고, 아이에게 젓 주는 일까지 하는 일이 실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므로 공력이 드는 길쌈은 통상 저녁 시간에 하기 마련이었다.294) 이순구, 앞의 논문, p.89.

가난한 집의 나라 세금은 심장을 도려낼 듯

시골 계집 옷 짜는 북은 이르는 곳마다 바빠

반 필 밖에 못 짠 면포를 잘라내어

밝기도 전에 모두 논산 장으로 달려간다.295) 金鑪, 『潭庭遺藁』 卷2, 艮城春囈集 黃城俚曲.

이는 과중한 세금의 폐단을 지적한 시이지만 이로서 길쌈으로 고단한 하층 여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반 필도 못 짠 면포를 잘라서 날이 밝기도 전에 장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그들의 경제 사정이 결코 녹녹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오희문은 길쌈에 열중하는 여비의 모습을 가리켜 “우리 집 비자들이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밤 문밖에 횃불을 걸고 돌아 앉아 방적을 한다.”고 하였다.296) 『쇄미록』 1598년 7월 11일조. 이로서 횃불 주위에 삥 둘러 앉아 밤 새워 길쌈하는 여비들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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