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2. 주인의 손발로 살아가다
  • 생산 노동 종사
  • 2. 상행위(商行爲)
이성임

조선시대 상행위는 말단의 이윤을 취한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업적을 드러내는 문집과 같은 자료에는 선대의 인물이 근검과 청빈을 표방하고 이재(利財)를 천시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후손들이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이 학문이 높고 청빈한 학자로 기억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의 모습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양반은 다른 계층에 비하여 부를 형성할 조건을 갖추었으며, 스스로 재산을 형성, 증식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내세웠던 명분과 이 상은 실제의 모습과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오희문의 『쇄미록』과 이담명(李聃命, 1646∼1701)의 『일록(日錄)』에는 상행위에 집중하는 양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남노는 물론 자신의 여비까지 상행위에 가담시킨 인물이 오희문이다.297) 이하는 이성임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조선 중기 吳希文家의 商行爲와 그 성격」, 『朝鮮時代史學報』 8, 1999). 그는 자신이 직접 상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노비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현대적으로 보면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인물이다. 경제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황 판단도 정확하였다.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말과 노비를 동원하여 근거리 무역과 원격지 교역을 행하였다. 여기에 동원된 노비는 대부분 남노이지만 일부 근거리 교역에는 여비도 참여하였다. 구체적인 상행위 담당자는 막정(莫丁)·덕노(德奴)·춘기(春己)·개질지(介叱知)·수이(守伊)·향춘(香春) 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희문의 상행위는 어려운 피란살이를 견뎌내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그의 피란생활은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하였으며, 특히 충청도 임천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였다. 오희문은 술과 떡, 그리고 행전(行纏) 등을 만들어 여비로 하여금 내다 팔게 하였다. 당시는 양반의 체모를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술장사·떡장사로 나선 것이다.

먼저 술장사를 하는 모습부터 살피기로 한다. 술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술을 빚어야 하였다. 그러나 오희문에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임천 현감을 찾아가 구한 누룩과 쌀로 술을 빚어 여비 향춘(香春)으로 하여금 시장에 내다 팔았다. 술을 팔아 곡식으로 바꾸면 양식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때에 오희문은 좋아하는 술을 놓고도 한 잔도 마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298) 『쇄미록』 1593년 10월 21일조. 술장사는 오희문의 생계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여비 향춘은 주인의 뜻을 잘 따라 주지 않았다. 즉, 술항아리를 이고 가다 넘어져 술을 쏟은 것은 물론이고 항아리까지 물어주게 하였다. 또한,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술을 팔아 얻은 쌀을 잊어버렸다고 고하였다.299) 『쇄미록』 1593년 8월 27일, 11월 9일, 11월 22일, 윤11월 12일조.

확대보기
부상 부부
부상 부부
팝업창 닫기

또한, 오희문의 부인은 떡을 만들어 비로 하여금 시장에 내다 팔게 하였다.300) 『쇄미록』 1594년 3월 11일, 26일조. 이러한 것들이 생활에 일부 보탬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떡을 만들어 놓았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장사를 못나가 낭패를 보았다. 또한, 오희문은 집안의 여아와 여비로 하여금 행전을 만들게 하여 이웃에 팔았다.301) 『쇄미록』 1593년 10월 20일조. 작은 옷가지라도 만들어 양식에 보탤 요량이었다. 이러한 상행위로 양반은 이윤을 얻었고, 노비는 상행위 테크닉을 익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