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3. 불완전한 혼인
  • 강요된 혼인: 양천교혼(良賤交婚)
이성임

노비는 고려시대까지 그리 많지 않았으나 15∼17세기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전 인구 가운데 30∼40%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비 인구가 증가하게 되는 한 가지 현상으로 양천교혼(良賤交婚)을 들 수 있다. 이는 양인과 천인이 혼인을 하는 것으로,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에 의하여 부모 중 천인이 있으면 그 자식들은 모두 천인이 되었다. 즉, 어머니든 아버지든 어느 한 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들이 모두 노비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종모법(從母法)의 원리에 따르면 부모가 모두 노비일 경우 그 소생은 모의 주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비주는 노는 양녀와, 비는 양인이나 다른 집 노와 혼인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래야만 자신의 노비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천교혼이 어느 정도로 흔하였는지는 경상도 울산의 호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령 1609년(광해군 1) 경상도 울산의 사노비는(私奴婢) 60%가 공노비(公奴婢)는 27%가 양인과 교혼하였으며, 사노비 중에서는 솔거노비(率去奴婢)의 교혼율이 외거노비(外居奴婢)의 교혼율보다 높았고, 특히 솔거노비는 74%가 양녀와 혼인한 것으로 확인된다.302) 韓榮國, 「朝鮮中葉의 奴婢結婚樣態-1609年의 蔚山戶籍에 나타난 事例를 中心으로-」, 『歷史學報』 75·76, 77, 1977, 1978. 즉, 공노비와 사노비의 교혼율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외거보다는 솔거의 교혼율이 높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즉, 이들 노비의 혼인에 노비주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노비주는 재산 관리 차원에서 노비의 혼인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집안의 노비가 서로 혼인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주인의 허락이 없는 노비의 성관계는 금물이었다. 1546년(명종 1) 7월 이문건은 자신의 집 노 수손(守孫)이 비 교란(攪亂)을 간(奸)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쳤다.303) 『묵재일기』 1546년 7월 17일조. 1557년(명종 12) 2월에는 비 윤개(尹介)가 노 억근(億斤)과 간통하였다는 이유로 태 80을 맞았다.304) 『묵재일기』 1577년 2월 6일조. 노비의 성관계를 규제하는 데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 필이(必伊)가 비 옥춘(玉春)과 성 관계를 맺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305) 『묵재일기』 1561년 7월 7일조. 이들은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1년 이상 관계를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저녁 무렵 측간에서 나오는 필이를 만난 이문건은 옥춘을 간통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필이는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이에 크게 야단을 맞은 필이는 간통은 단 한 차례뿐이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였다.306) 『묵재일기』 1562년 7월 7일조. 이처럼 한 집안의 노비가 1년 이상 성관계를 맺어 왔어도 이것이 혼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노비들의 성관계는 규제의 대상일 뿐, 혼인과는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반면 눌질개와 방실의 혼인은 권장되었다. 숙길이 태어날 당시 이문건 가에는 비눌질개와 춘비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눌질개는 수명(守命)이라는 아이를 두었지만 그녀가 혼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춘비는 정상적인 혼인관계 하에서 아들을 낳 았다. 춘비는 남편 방실과 혼인하였고, 그 사이에 검동이를 두었다. 이문건은 숙길의 유모를 눌질개에서 춘비로 바꾸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춘비가 병을 얻어 온갖 고생을 하고, 이 와중에 아들이 죽고, 이어 부인도 죽자307) 『묵재일기』 1551년 9월 8일조. 방실의 슬픔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죽은 처를 위해 굿을 하였다.308) 『묵재일기』 1551년 10월 6일조. 그러나 춘비가 죽은 지 한 달 반쯤 지나 갑자기 눌질개가 방실에게 시집을 가고 있다.309) 『묵재일기』 1551년 11월 18일조. 방실과 눌질개가 사랑하는 사이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눌질개의 입장에서 자식과 처를 한꺼번에 잃은 방실의 신세가 안타까웠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 혼인이 성립되었을까. 여기에는 노비주 이문건의 이해 관계가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이문건은 방실이 재혼하는 것이 슬픔에서 벗어나는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였고, 내심으로는 홀아비 방실과 과부 눌질개 사이의 또 다른 생산을 기대하였을 수도 있다.

주인의 입장에서 가장 고약한 혼인은 노가 다른 집의 비와 혼인하는 것이다.310) 이하는 이영훈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앞의 책, 2000, pp.104∼107). 이 경우 그 자식들이 모두 그 집의 노비로 귀속되어 재산상의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1637년(인조 15) 전라도 해남의 노 계룡은 그의 주인 윤씨 가에 논 14두락, 밭 9.6두락, 솥 3좌, 암소 한 마리라는 상당한 재산을 헌납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다른 집의 비와 혼인하여 자녀를 많이 낳았으니 그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곧, 여러 자녀가 모두 다른 양반가의 소유가 되어 윤씨 가에 재산상의 손실을 끼친 것이다.

비슷한 예는 경상도에서도 발견된다. 1540년(중종 35) 안동의 노 복만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그런데 복만이 다른 집의 비와 혼인한 연고로 두 딸은 모두 그 쪽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복만은 자기 주인인 이씨 가에게 자식 한 명조로 논 16부(卜), 밭 3부, 화로 1기, 구리 그릇 1기, 큰 소 두 마리라는 상당한 재산을 헌납할 수밖에 없었다. 계룡이나 복만이 주인에게 자신의 재산을 바치는 것은 주인의 뜻에 어긋난 혼인을 함으로 주인에게 끼친 재산상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갚고 그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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