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3. 불완전한 혼인
  • 자유로운 재혼
이성임

우리는 조선시대는 재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엄격한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양반 여성의 재혼을 억제하기 위해 그 자식에 대한 관직 진출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안정된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는 상층 양반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당시 사회는 혼자된 가난한 하층 여성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편이 사망하면, 재혼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다. 남편의 사망으로 끼니가 간 데 여성에게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수 십 년을 고통 속에 살아가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들에게는 유교적인 이념보다는 생활 그 자체가 훨씬 중요하였다. 사망률이 놓고 사회 보장 제도가 열악한 전통 사회에서 재혼율이 높은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하층민의 재혼은 일상적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아비를 알 수 없는[父不知] 혼외자를 낳을 수도 있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가난한 하층 여성에게 수절하며 혼자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것도 유교적인 시각인 것이다.

단성현 호적 대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홀아비의 재혼율은 평균 50%가 넘는다. 이는 계층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상층 30.8%, 중층 57.6%, 하층 69.5%로 나타났다. 특히, 하층 남성의 재혼 상대는 30세 이상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들의 상당수는 혼인 경험이 있는 과부였음이 분명하다.311) 김건태, 「18세기 초혼과 재혼의 사회사」, 『역사와 현실』 51, 2004. 결국 이를 뒤집어 보면 하층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곧바로 재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호적은 공적인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개가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자료의 성격상 호적상에 드러난 재혼의 흔적은 실제보다 훨씬 축소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312) 손병규,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 휴머니스트, 2007, pp.133∼162. 여성의 재혼 사실은 호적상에 ‘데리고 들어간 자식’의 존재 여부로(義子女로 등재) 판단할 수 있다. 과부가 자신의 자식들을 새로운 남편의 호에 등재시키면 이들의 혼인은 재혼인 것이다. 의자녀 이외에도 ‘이부녀(異父女)’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것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호적에는 후부가 개가한 여성의 호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 때에 여성의 아들은 아버지를 ‘계부(繼父)’라 한다. 의자·의부·계부라는 표기는 1678년 호적 대장에 7건, 1717년에 16건, 1783년에 6건이 있으며, 19세기 초에도 2-3건이 발견된다.

의자녀의 모습은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주로 하층민에서 나타난다. 1545년(인종 1) 3월 이문건의 노 귀인손(貴仁孫)의 의자 구인(具仁)이 다녀갔다. 어떠한 이유에서 인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문건으로부터 관찰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갔다.313) 『묵재일기』 1545년 3월 5일조. 1544년(중종 39) 경상도 화원에서는 큰 살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는 수군 이영손(李永孫)의 동생과 이모제(異母弟), 의모(義母) 등이 함께 공모하여 벌인 것 이었다.314) 『묵재일기』 1554년 2월 29일조. 1556년(명종 11) 11월 성주 지역의 무당 추월(秋月)은 이문건에게서 종이와 생포(生布) 등을 얻어 갔는데 이는 의자의 상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다.315) 『묵재일기』 1556년 11월 7일조. 이상에서와 같이 하층민간에는 생각보다 재혼이 빈번하였으며, 이들의 가족 관계는 의자를 사용하여 친자녀와 구별하였다.

하층민들에게는 한번 혼인하면 평생 해로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평생 해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들은 혼인할 때 양반과 같이 엄격한 의례를 갖추지도 못하였다.316) 이영훈, 앞의 책, pp.107∼110. 그래서인지 이들의 결합에는 혼인의 강제성과 사회적 공인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물론 양반의 삶의 모습을 쫓아 안정적인 부부관계 를 유지하는 경우가 상당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혼인이 갖는 사회적 구속력도 그리 강하지 못하여 그저 함께 살면 혼인이고 떠나가면 이혼이었다.

이는 양인 박의훤(朴義萱)의 혼인 사례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317) 이하는 문숙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다섯 妻를 둔 良人 朴義萱의 재산상속문제」, 『문헌과 해석』 7, 1999 ; 「양인의 혼인과 부부생활」, 『조선시대생활사』 2, 2000, pp.91∼97). 박의훤 분재기는 일반 양인이 남긴 분재기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성 시기는 1602년(선조 35)으로 박의훤의 땅 일부가 해남 윤씨에게 팔려가면서 윤씨 집안에서 400년 가까이 보존해 온 것이다. 본 분재기는 박의훤과 그의 처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박의훤은 모두 다섯 명의 처를 얻었는데, 당시 다섯 번째 처인 여배(女陪)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박의훤과 그의 처와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보자.

박의훤의 본처 이름은 은화(銀花)인데 박의훤의 곁을 떠나 다른 남자와 살다가 죽었다. 기록상에는 “본처는 다른 여자의 남편인 박언건이라는 자와 잠간(潛奸)하여 남편으로 삼고 살다가 그냥 죽었다.”라고 되어 있다. 즉, 박의훤의 본처 은화는 본처임에도 처가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아 몰래 간통하여 살다가 죽은 것이다.

두 번째 처의 이름은 진대(進代)이다. 박의훤의 젊은 시절 그녀가 박의훤을 따라와 함께 살게 되면서 그녀와의 혼인 생활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특별한 혼인 절차 없이 진대가 일방적으로 박의훤을 따라와 살게 되면서 부부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진대가 박의훤의 소유였던 노와 통간(通奸)하여 실행한 사실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지자 그녀는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떠난 진대는 도망 길에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 그와 상간(相奸)하여 함께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박의훤은 이들 두 처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었다.

박의훤의 세 번째 처는 몽지(夢之)였다. 박의훤과 몽지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그 후 그녀 역시 홍천귀라는 양인 남자를 만나 그와 잠간하여 박의훤 곁을 떠났다. 몽지는 홍천귀와 금실이 좋아 그와의 사이에 많은 자식을 낳고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박의훤의 네 번째 부인은 가질금(加叱今)이었다. 그는 가질금과는 좀 다른 혼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의훤이 가질금을 만난 것은 그가 한창 나이로 관문에 출입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가질금과 화간(和奸)하여 그녀를 처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녀와 한 집에 동거하지 않았고 그녀를 멀리 읍내에 살게 하였다. 어떠한 이유에서 인지 박의훤과 가질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박의훤에 주장에 의하면 가질금은 자신의 딸을 낳자마자 바로 상대를 교체해 가며 대여섯 명의 남자와 잠간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녀가 본시 난잡한 여인이었다고 원망하였다. 반면에 가질금은 “다른 사람과 간통한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다.”며 박의훤이 자신 주변에 접근도 못하게 하며 대치하였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모르겠으나 두 사람은 그런 이유 때문에 별거 상태에 있었다.

이와 같이 박의훤은 4명의 처와 혼인하였다가 이혼하였으나 그 기간은 그리 길이 않았다. 다만, 다섯째 부인 여배만이 40년 째 그와 동거하고 있다. 가질금과 헤어진 뒤 여배를 만나 그녀와의 사이에 박원붕·대붕 두 아들을 낳으면서 계속 혼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박의훤은 여배와 오랜 세월 함께 살면서 자식도 낳았고 재산도 불리는 등 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므로 그녀와 그 자식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고자 이런 분재기를 작성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멀리 제주도에서도 일어났다.318) 이하는 이성임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19세기 제주 大靜縣 邑治 거주민의 혼인 양상」, 『대동문화연구』 57, 2007). 제주도 대정현에는 읍치 지역인 「동성리호적중초(東城里戶籍中草)」와319) ‘동성리 호적중초’는 1711년부터 1922까지 43개 식년 분이 연속적으로 남아있다. 『대정현아중일기(大旌縣衙中日記, 1817∼1818)』가320) 19세기 전반 대정현감에 부임한 金仁澤의 일기로 1817년 3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1년 분이 남아 있다. 함께 남아 있다. 일기는 1817년(순조 22) 대정 현감으로 부임한 김인택(金仁澤)의 것으로 현재는 1년분만 남아 있다. 그러면 여기서는 일기와 호적 중초에 근거하여 김몽 득의 가계를 들여다보도록 하자. 하층민의 경우 부부가 재혼인 경우가 많으며, 첩과 혼외자도 있어 가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도표를 그려보았다.

<표> 고자(庫子) 김목동(金夢得)의 가계
무용(관비)
남편 1, 진재(양인)­­­­­­­­­­­­­­① 아들 김몽득(관노)
남편 2, 양인룡(전죄수)­­­­­­­­­­② 딸 도강월(관비)
                               ­­딸양섬

→ ① 아들 김몽득(관노, 집사, 업무)
전처 금덕(내자시비)­­­­­­­­­­­­­­아들 탐봉
후처 입소사(통정 중주), 임소사도 재혼, 의녀 임예
첩 김예, 첩도 재혼, 의녀 김예

→ ② 딸 도강월(관비)
남편 1, 口口口 ­­­­­­­­­­­­­­­­­­딸, 영산월(관비, 대정현감 김인택의 방직기)
남편 2, 제임마색 강봉상 ­­­­­­­­­딸, 강상의

그러면 먼저 김인택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김인택은 대정현에 부임하여 기녀 영산월(瀛山月)과 동정월(洞庭月)을 방직기(房直妓)로 삼는다. 이 중 영산월은 김인택의 방기로 배정되었다가 3개월 만에 쫓겨난 여성이다. 당시 그녀는 대정현 소속의 관기였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어미는 도강월(渡江月)이며 외삼촌은 김몽득이다. 그러나 김몽득과 도강월은 가정 내에서의 위치가 서로 달랐다. 김몽득은 본처의 자식이고 도강월은 혼외의 자식이다. 어쨌든 이들은 어미는 같지만 아비가 다른 의붓 남매지간이다.

김몽득의 모인 무용(관비)은 남편이 둘 있었다. 첫째 김몽득의 아 비는 양인 진재이다. 이는 정상적인 혼인 관계로 보인다. 김몽득의 조(祖)가 서원, 외조(外祖)가 한량인 것으로 보아 이들 가계는 말단 향리라고 하겠다. 김몽득은 어미의 신분을 쫓아 대정현 관아에서 관노의 신분으로 창고지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무용은 또 좌수를 역임한 양인용과의 사이에서 도강월과 양섬을 낳았다. 이는 정상적인 혼인 관계라고 하기 어렵다. 즉, 좌수 양인용이 관비 무용을 취하여 도강월과 양섬을 낳은 것이다.

다음 영산월의 외삼촌 김몽득의 가계를 살펴보자. 그는 대정현 소속의 고자(庫子)로 2명의 처와 1명의 첩을 두었다. 전처 금덕은 내자시비로 김몽득보다 12세 연하였다. 아들 탐봉은 김몽득과 금덕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김몽득은 자신보다 11세 연상인 임소사와 재혼한다. 임소사는 통정 중주의 딸이다. 그러나 임소사도 초혼은 아니었다. 그녀는 과년한 딸을(26세) 데리고 왔으며, 그녀는 호적에 김몽득의 의녀(義女)로 등재되었다. 임소사가 더 이상 호적에 등재되지 않자 첩 김예가 등재되고 있다. 김예를 언제 취첩하였는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예도 초혼은 아니었으며, 그녀가 데리고 온 딸(10세)도 마찬가지로 김몽득의 호에 의녀로 등재되었다.

영산월이 도강월의 딸임은 분명하나, 그녀가 호적에 등재되지 않아 그 아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비가 누구든 간에 도강월이 관비이므로 그 딸인 영산월도 관비일 수밖에 없다. 이후 도강월은 체임마색 강봉상(姜鳳祥)의 첩이 되어 딸 강상의를 낳는다. 도강월이 강봉상의 첩으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도강월과 강봉상의 첩이 심하게 싸웠다는 일기의 내용을 통해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도강월은 강봉상의 첩이었다. 그러므로 영산월이 강봉상의 호에 들어가면 의녀로 등재되었을 것이다. 강봉상의 가계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807년 호적에 강봉상의 호에 처 김예(金乂, 명월방군 업용의 딸)와 첩 김예, 그리고 전처의 딸 2명이 등재되었다. 전처 의 딸이 등재된 것으로 보아 김예도 본처가 아니라 후처였다. 호적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최덕(崔德)이라는 첩도 존재하였다. 여기에 도강월까지 합하면 기록으로 드러난 것 만도 처가 2명, 첩이 3이 되는 것이다.

강봉상은 대단한 호색한으로 이로 인해 상당한 고초를 겪는다. 1817년 6월 도강월과 강봉상의 첩이 심하게 싸워 도강월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도강월의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흐르자 오빠 김몽득은 이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결국 강봉상은 이 일로 인하여 곤장 7대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강봉상의 처와 첩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1817년 9월 첩 최덕이 본처를 때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대정 현감은 강봉상에게 곤장 8대를 쳤으며, 처가 강봉상이 유부녀를 작첩하였다는 이유로 동거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강봉상은 체임마색에서 사령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다. 대정 현감은 처에게도 일정한 제제를 가하였다. 대정 현감이 부인에게 남편과의 동거를 강권하였으나 듣지 않자 결국 부인에게 회초리 50대를 치도록 한다.

하층민의 정절 관념과 관련하여 제주도 대정현에 흥미로운 사례가 보고되었다. 1817년 9월 안광신(安光臣)은 처와 간통한 혐의로 강선경(姜善慶)과 강대손(姜大孫)을 고발하였다. 이 사건은 안광신의 처가 시어머니와 싸움을 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싸움을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녀는 큰 아들은 강선경에게, 작은 아들은 강대손에게 데려다 주면서 “이 아이는 네 아들이다”라고 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이웃 마을로 옮겨갔지만, 이들은 이전에 안광신의 이웃에 살고 있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안광신은 10년 이상 남의 자식을 자신의 아들로 알고 살아온 사실이 억울하여 자신의 처와 두 남자를 관아에 고발하였다. 이에 대정 현감은 강선경과 강대손을 목자(牧子)로 강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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