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3 타자화된 하층 여성의 몸
  • 03. 불완전한 혼인
  • 양반의 첩살이
  • 2. 첩이 되는 여비들
이성임

조선시대의 혼인 제도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이나 이는 축첩을 용인하는 제도였다. 양반 사족은 본처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양인 이하의 여성을 맞이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흔히 첩·소실·측실·부실·후실 등으로 불린다. 양반 사족은 여성을 사회적 여건에 따라 존비와 귀천을 기준으로 서열화하였다. 상층 여성의 성은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 대상인 반면, 하층 여성의 성은 하찮은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양반 사족과 하층 여성의 결합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하층 여성들 중에는 양반 사족의 첩이 되어 유족한 생활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양반 사족은 기녀 이외에 여비를 첩으로 들이고 있었다. 여비는 기녀에 비해 그리 매력적인 상대는 아니었지만 쉽게 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여비가 결혼하였을 경우 주인은 여비의 성을 향유하기 위해 남편과의 잠자리를 강제로 분리시킬 수도 있었다. 주인과 여비의 결합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들이 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자식의 잉태 여부였다. 유희춘의 아들 경렴이 자신의 여비인 복수를 취첩한 것도 그녀가 자식을 잉태하였기 때문이었다.

양반가의 얼자녀를 첩으로 취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혼인에 임박하여 양인화(贖良)하여도 양반가의 본처로 출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즉, 이들은 신분 내혼 규정에 따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혼인하든지 아니면 양반의 첩으로 출가할 수밖에 없었다. 유희춘은 종성에서 취첩한 무자(戊子)와의 사이에 4명의 얼녀를 두었다. 이들은 혼인하기 전에 속량의 절차를 마쳤지만 양반의 본처로 출가하지 못하고 무반의 첩으로 출가하고 있다. 법적으로는 양인화되었지만 관념적으로는 여전히 얼산(孼産)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323) 具完會, 「조선 중엽 士族孼子女의 贖良과 婚姻:『眉巖日記』를 통한 사례검토」, 『慶北史學』 8, 1985.

처를 사별한 양반이 다시 정혼하지 않고 첩을 두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양반 남성은 재혼할 때 혼인한 경력이 있는 과부를 상대로 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실녀(室女,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서 전처와 엇비슷한 가격(家格)을 소유한 혼처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과부를 재혼 상대로 정하거나 상대의 반격(班格)을 낮출 경우 향촌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황윤석(黃允錫, 1729∼1791)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황윤석은 부인이 사망하자 정혼 상대를 구하지 않고 첩을 들이고 있다. 이곳저곳 수 소문한 결과 송순(宋純, 1493∼1582)의 얼산을 첩으로 들였다. 나이 50이 다된 시골 양반이 새로운 혼처를 구하기가 쉽지 않자 첩을 취하여 그녀와 노년을 함께 하였다.

첩은 들이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첩은 출계가 미약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대였다. 따라서 첩을 들이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상대가 타인의 비일 경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여기에는 속신(贖身)과324) 타인의 비를 사와 자신의 소유로 하는 절차를 일컫는다. 속량(贖良)325) 보충대에 입속하여 양인화 하는 절차를 말한다. 절차가 모두 필요하였다. 비의 주인은 잉태한 비를 팔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팔더라도 많은 비용을 요구하였다. 유희춘의 조카 오언상(吳彦祥)은 다른 사람의 비인 말대(末臺)를 겁간하여 작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인이 말대의 몸값으로 비 4구를 요구하는 바람에 되물릴 수밖에 없었다.

강진에 살던 마응허(馬應虛)는 나사순(羅士淳, 유희춘의 이종사촌)의 비 온화(溫花)를 몰래 작첩한 후에 몇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사실이 알려지자 마응허는 나사순에게 비 윤개(尹介)와 그 소생(平之·海伊)으로 온화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미를 알아 챈 운개가 자식을 데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오희문의 『쇄미록』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희문의 아들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은 본처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낳은 자식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그래서인지 오윤겸은 첩을 얻고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한번은 타인의 비인 진옥(眞玉)과 관계하여 만삭이 되자 첩으로 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진옥의 주인이 팔지를 않아 결국 첩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떠나가는 진옥을 보며 오희문은 ‘잉태한 자식이 만약에 죽지 않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라고 걱정하고 있다. 태어나 근심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오희문은 진옥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갑 자기 어린 손녀가 보고 싶어 졌다. 그러자 진옥은 어린 딸과 함께 술을 들고 오희문을 찾아왔다. 진옥은 딸아이의 이름과 출생일을 오희문에게 알려주며 하염없이 운다. 아이가 걷고 말을 하는 것이 사랑스러웠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오희문은 진옥이 개가하였는지가 궁금하였으나 이는 차마 묻지 못하고, 간단한 예물을 주어 말을 태워 보냈다.

상대가 자기 비인 경우 취첩 과정은 훨씬 수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소생의 신분 귀속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즉, 자기 비첩이 낳은 자식을 속량시키지 않을 경우 혈육 간에 주종 관계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 이들 얼자녀는 자식이라는 측면과 재산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가능하면 속량시키지 않는 것이 당시 양반들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다만, 골육상잔(骨肉相殘)의 폐해를 막기 위해 1∼2대 방역(放役)한 후 환천하여 사환시켰으며, 형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 친인척끼리 바꿔 사환시켰다.

유희춘의 아들 유경렴은 자기의 비 복수(福壽)를 첩으로 삼아 아들 연문(衍文)을 낳았다. 그러나 모자는 유경렴이 살아있는 동안 속량이 되지 못하고 장자인 광선(光先)에게 상속되었다. 유경렴은 분재기에 첩과 얼자의 문제에 대하여 ‘비 복수는 수신(守身)하거든 방역하여 추심하지 않으나 명신(名信)이 서로 다르거든 일찍이 문기대로 할 일’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유경렴은 젊은 첩(27세)이 재혼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 재혼하면 즉시 천인으로 돌리라고 자식들에게 전하였다.326) 이성임, 「16세기 양반관료의 外情」, 『古文書硏究』 23, 2003, p.49.

친인척끼리 바꾼 사연은 김연(金緣) 집안의 별급 문서를 통해 확인된다. 김채(金綵)의 부 김효원(金孝源)은 자기 비첩을 취하여 얼자 북간(北間)을 두었다. 그 후 북간과 양처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김효원의 아들인 김채에게 상속되었다. 김채는 자신의 얼제와 얼조카를 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다. 김채는 골육지친(骨肉之親)을 사환하는 것 이 불편하여 사촌형인 김연에게 북간과 자식 및 손자 7명을 지급하였다.327) 문숙자, 「15∼17世紀 妾子女의 財産相續과 그 特徵」, 『朝鮮時代史學報』 2, 1997, pp.23∼24.

첩으로 들인 이후에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328) 이하는 이성임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조선시대 兩班의 蓄妾 현상과 경제적 부담」, 『古文書硏究』 33, 2008). 첩을 들인 후 시간이 지나면 첩은 이제 성적 대상이 아니라 보살펴야 할 식솔이된다. 유희춘은 첩가의 생계 대책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 필요한 물품을 보내주는가 하면 노비를 지급하기도 하고 자신이 배정받은 반인(伴人)을 첩가에서 사역하도록 하였다. 첩 무자도 남편의 영향력을 동원하여 상당한 부를 집적하였으며, 지방관의 도움을 얻어 20여 칸이 넘는 집을 짓기도 하였다. 『어우야담』에서 강구수란 자는 “나는 밥을 먹이지 않아도 되고 옷을 해주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첩을 얻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것은 첩을 얻는 것이 양반 사족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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