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2. ‘아름다운’ 얼굴과 몸의 조건
  • 미인의 조건
정해은

“빼어난 여색은 반찬이 된다는 말은 천년을 두고 내려오는 아름다운 말이다.” 이 말은 청(淸)을 왕래하던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85)이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이라는 춘화첩(春畵帖)에 붙인 발문이다. 예의바름을 강조하면서 여색을 불온시하고 금기시한 조선 사회는 그 내부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여성이나 여색에 대한 욕망이 활발하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허균(許筠, 1569∼1618)은 “윤리는 성인이 만든 것이고 정욕은 하늘이 내린 것이니 비록 성인을 어길지라도 하늘을 어길 수 없다.”는336) 박무영, 「규방의 한시문화와 가족 사회」, 『한국의 규방문화』, 박이정, 2005, p.80. 발언으로 유명한 사람답게 일찍이 여색에 대한 본인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례로 허균은 화원 이징(李澄, 1581∼?)에게 여러 가지 모양을 그려서 엮은 소첩(小帖) 하나를 부탁하면서 마지막 부분은 아이를 씻기는 두 여인의 그림으로 장식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소첩을 받아든 허균은 두 여인의 그림에 대해 남성으로서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 솜씨가 이정(李楨)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자세히 보면 풍성한 살결이며 아양 부리는 웃음이 요염함을 한껏 발산하여 아리따운 자태가 실물처럼 보이니 역시 신묘한 작품이다. 이것을 오래도록 펴놓고 싶지 않으니 오래 펴놓으면 밤잠을 설칠까 두려워서다.”337) 허균, 『성소부부고』 권13, 文部 題跋 「題李澄畵帖後」. 아리따운 자태를 한 여인의 그림 때문에 밤잠을 설칠까 두렵다고 한 허균의 이 말은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욕망을 은유나 도덕으로 숨기지 않은 채 그대로 표출하고 있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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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녀도, 김홍도
사녀도,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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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미모를 시각적으로 형성화한 미인화는 당(唐) 시절인 8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독립된 장르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조선도 건국 초부터 왕실이나 사대부들 사이에서 여성의 용모를 그린 그림이 감상용으로 유통되었다. 사녀도(仕女圖)라고도 불린 이 그림은 전기에는 주로 교훈을 전달하는 감계의 목적으로 유통되었다. 미인이란 망국과 환난의 단서가 되므로 여색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담았고 그림 속 여성도 중국의 어진 왕비나 현명한 아내,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중후반 이후로 조선에서도 미인도가 감계의 목적을 넘어서 감상만을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338) 문선주, 「조선시대 중국 仕女圖의 수용과 변화」, 『미술사학보』 25, 미술사학연구회, 2005.

허균의 요청에 따라 이징이 그린 그림이 여기에 해당할 듯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감상용으로 그린 대표적인 작품은 신윤복(1758∼?)이 그린 <미인도>를 꼽을 수 있다. 소매통이 좁고 짧은 삼회장 연미색 저고리에 풍성하게 부푼 옥색 치마, 까맣고 커다란 트레머리를 한 채 살포시 아래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 여성은 제목 그대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린 사람의 가슴에 춘정(春情)이 서려 있어 붓으로 실물에 의해 참모습을 나타냈다.”는 화제(畵題) 처럼 감상하는 사람의 춘정을 일으키는 이 그림은 조선시대에 미인의 모습이 어떠하였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339) 이태호,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 여성신문사, 1998.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당대에 드러내놓고 논의한 글이 없기 때문에 사실 조선시대 미인의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다만, 일반 자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조선시대 소설류나 여성 인물화 등을 통해서 조선시대 사람이 생각한 미인의 기준을 일부나마 찾아낼 수 있다.

먼저 조선시대 소설에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구체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인상이나 감성 등을 자연에 비유해 간접적으로 묘사하였다. 대표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비유는 ‘선녀’ 같다는 것이었다. 천하의 명기로 알려진 황진이의 외모도 여러 자료에 ‘선녀’같다고 표현되었다.

『곽씨전』에 나오는 여성의 대한 묘사를 보면 조선인들이 생각한 미인이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 있다. “이 때 선풍에 사는 곽참판 댁에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가 16세가 되었더라. 인물은 태이에게 비교할 만하고 얼굴은 아침 해당화가 이슬을 머금은 듯하더라. 아리따운 얼굴과 고운 태도는 구시월 보름달이 구름 속에서 반쯤 나오는 듯하니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340) 김수봉 역·주해, 「곽씨전」, 『한글필사본 고소설 역·주해』, 국학자료원, 2006, p.27. 이 글처럼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앳된 소녀가 발산하는 풋풋하면서도 청초한 모습이었다.

기존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진미인(眞美人) 또는 진국색(眞國色)이라 하여 미인으로 꼽는 나이는 16세에서 18세 사이의 소녀였다. 얼굴은 보름달이나 꽃 또는 하얀 옥 같아야 하였다. 얼굴에서 눈썹이 중시되어 초생달이나 버들잎처럼 검고 가는 눈썹이 둥글게 다듬어진 상태를 아름답다고 여겼다. 눈 역시 가늘고 긴 모양이 선호되었고 피부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흰 눈이나 옥같은 상태여야 하였 고, 목은 길고 수려해야 하였다. 머리숱은 풍부하고 곱게 다듬어져야 한다. 허리는 유연하고 잘록한 모양, 손은 가늘고 흰 상태를 최상으로 보았고 키 역시 작고 아담해야 하였다.341) 홍선표, 「화용월태의 표상: 한국 미인화의 신체 이미지」, 『한국문화연구』 6, 2004, pp.40∼46. 가슴에 대한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으나 연적처럼 작고 아담한 모양을 선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42) 김종택, 「한국인의 전통적인 미인관-고전소설의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여성문제연구』 8, 1979, p.10.

이와 반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씨전』에서는 박씨의 못생긴 외모에 대해 우스꽝스럽게 표현하였다. “그제서야 신부의 용모를 본즉 얼굴에 더러운 때가 줄줄이 맺혀 얼근 구멍에 가득하며, 눈은 다리 구멍 같고, 코는 심산궁곡에 험한 바위 같고, 이마는 너무 버스러져 태상노군(太上老君) 이마 같고, 키는 팔척장신이요, 팔은 늘어지고, 다리 하나는 절고 있는 모양 같고 그 용모를 차마 바로 보지 못할지라.”343) 「박씨부인전」(조선도서주식회사본) : 소재영·장홍재 지음, 『임진록·박씨전』, 정음사, 1986, 150쪽. 이런 박씨가 흉한 허물을 벗자 선녀로 비유하여 “월궁항아(月宮姮娥) 아니면 무산선녀(巫山仙女)라도 믿지 못할지라.”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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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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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여성의 아름다운 미모는 여성 스스로에게도 큰 힘을 발휘하였다. 조선시대처럼 여성들이 법률·문화·경제·정치 등 다른 형태의 수단을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던 시기에 아름다운 외모는 여성에게 결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장녹수가 궁에 들어간 시점은 30세를 전후한 나이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녹수가 천첩소생으로서 집이 가난해 몸을 팔아서 생활하였고 혼인도 여러 번 하였다고 한다. 궁에 들어갈 시점에 이미 남편과 아이까지 딸린 상태였던 장녹수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미모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 대신에 30대 초반에도 16세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童顔)이었다고 한다.344) 『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 8년 11월 갑오. 아마도 장녹수가 늦은 나이에 궁에 들어갈 수 있던 것도 어린얼굴 덕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또 다른 사례는 가난한 여성이 미인이면 사회적으로 취약 한 위치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사악한 유혹자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없던 가난한 미인은 주변의 유혹과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대 어리라는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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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묘
연산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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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은 일반 양인의 딸 어리가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집을 방문하였다. 어리에 대한 첫 인상은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한 눈에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리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단장을 하고 양녕대군을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양녕대군은 어리에 대해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도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고 회상하였다.345) 『세종실록』 권3, 세종 1년 1월 을해. 궁에 들어간 어리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아 대단한 출세를 하였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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