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2. ‘아름다운’ 얼굴과 몸의 조건
  • 아들 낳는 몸이 아름답다
정해은

조선시대 여성의 몸은 본인의 몸이 아니라 가족의 몸이었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활동한 이재(李縡, 1680∼1746)는 어머니 여흥 민씨의 묘지(墓誌)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680년 불초가 태어나고 1684년에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시자 집안 사람들이 어머니의 굳센 결심으로 혹시라도 더 큰 근심을 일으킬까 여겼다. 그러나 문정공(민씨의 친정아버지)께서 “우리 아이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 을 것이다.”라고 하셨고, 이미 어머님께서도 스스로 슬픔을 푸시고는 “나에게는 어린 고아 하나가 있으니 양육해서 성취시켜 선대의 제사를 모시게 하는 일이 바로 나의 책임인데 어떻게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고 죽을 작정을 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내외 종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346) 박석무 편,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현대실학사, 1998, p.69.

곧, 집안 사람들이 여흥 민씨가 남편을 따라 순절할까봐 걱정하였다가 민씨가 살아남기로 결정하자 안도하는 모습이다. 이 사례처럼 여성의 몸은 아이를 양육하고 선대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 가족의 것이었다. 주로 가정 안에서 아이를 양육하고 가족을 돌보는 역할이 주어졌고 이런 측면에서 사회나 가족의 요구에 순응하는 ‘유순한’ 몸이었다.

조선시대에 사회나 가족 안에서 여성의 몸은 아들을 낳을 때에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였고 가장 아름다운 몸으로 간주되었다. “여자의 직분은 출가하면 생남(生男)하는 것이 첫 일”이라는347) 「언간편지: 아들 못 낳는 죄, 참고 또 참고」, 『고문서로 읽는 영남의 미시세계』, 경북대학교 출판부, 2009, p.113. 말처럼 조선시대 여성의 몸은 아들 낳는 몸으로 구현되었다. 그래서 혼인하기 전에 ‘상녀법(相女法)’이라 하여 며느리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지, 특히 아들을 잘 낳을 수 있는 몸을 갖고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 였다.

조선 후기 실학서의 하나로 꼽히는 『증보산림경제』(유중림, 1766년 이후 추정)에는 아들을 잘 낳을 수 있는 여인을 아는 법이나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약방문, 잉태 시기,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체위법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역시 여성 몸에 대한 사회적 바람과 결부되어 있다.348) 『增補山林經濟』 권13, 求嗣.

『증보산림경제』에 따르면 여자에게 네 가지 덕이 있으면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첫째 평소 남과 싸우거나 겨루지 않는 것,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셋째 음식 을 절제할 것, 넷째 어떤 일을 들어도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가짐이 첫째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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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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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책에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얼굴도 제시하고 있다. 노랑 머리나 붉은 머리의 여성, 눈의 흰 창이 붉거나 누른 기가 있는 여성, 눈이 깊숙이 들어갔거나 눈썹이 성근 여성, 납작코를 가진 여성, 이마가 높고 얼굴이 꺼진 여성, 이마에 주름살이 많은 여성, 미간에 마디가 있는 여성, 얼굴이 길고 입이 큰 여성, 콧구멍에 콧수염이 많은 여성, 어깨가 축 처진 여성, 허리가 너무 가는 여성, 엉덩이가 허약한 여성, 입술에 검은 빛이 도는 여성 등이다.

현실적으로도 조선시대에 임신한 여성의 관심은 뱃속에 든 아이의 성별이었다. 임산부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도 출산 때까지 태아가 아들일까 딸일까 하는 호기심과 걱정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남아 선호 때문이었다. 남아 선호는 가부장제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으나, 조선시대에 가문에 대한 밝은 전망은 남아의 출생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므로 남아 선호는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빙허각 이씨가 『규합총서』(1809)에서 ‘임신 중 여자 아이를 남자 아이로 바꾸는 법’을 소개하면서 태아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고 우려하였으나, 빙허각 역시 ‘너 덧 달 지난 뒤 사내애인지 계집애인지 알아내는 법’을 기록할 만큼 태아의 성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349) 빙허각 이씨, 『규합총서』 권4, 청낭결 귀과사오삭변남녀법·미급산월젼여위남법(정양완 역주, 『규합총서』, 보진재, 1975, pp.327∼329). 사주당이 『태교신기』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여자 고르는 방법과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교육에 대해서는 옛 책에 이미 자세히 나와 있어서 덧붙일 말이 없다.”고350) 『태교신기』 부록, 「跋」(柳儆). 하였듯이 민간에서 아들 낳는 법은 초미의 관심사였고, 태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이 공공연하게 소개되고 시도되었다.

실제로 1433년(세종 15)에 여말선초의 향약(鄕藥) 및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처방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의서인 『향약집성방』에는 남아를 낳는 법이 소개되어 있다.351) 『鄕藥集成方』 권57, 轉女爲男法. 이후 태아의 성별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동의보감』(1610)에 더 자세하게 정리되었다. 이 책에는 임산부의 배 모양이나 행동을 통해 딸인지 아들인지를 알아내는 법[辨男女法], 임신 4개월에 맥을 짚어 남녀 성별을 구별하는 법[脈法], 쌍둥이가 태어나는 원인을 설명하면서 남자 또는 여자 쌍둥이가 형성되는 경우를 소개한 내용[雙胎品胎],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법[轉女爲男法] 등이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352) 許浚, 『東醫寶鑑』 雜病 권10, 婦人.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의학서나 여러 서적에 태아 성별과 관련한 내용이 꾸준히 수록된 점은 태아의 성별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하나의 실례로서 16세기 양반 관료로서 경상도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이문건(1494∼1567)을 꼽을 수 있다. 이문건은 며느리가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도 손녀를 낳자 “계속 여아를 낳아 (손녀에게) 애정이 가지 않는다.”는353) 이문건 저, 이상주 역주, 『養兒錄』, 태학사, 1997, p.136. 감회를 나타냈다. 그런데 1551년에 며느리가 세 번째 아이로 아들을 낳자 이문건은 기쁜 마음에 “귀양살이 쓸쓸하던 차에 마음 흐뭇한 일이 생겨 / 내 스스로 술 따라 마시며 자축하네.”라는 시를 지었으며, 주변 사람들도 축시를 보내주었다.354) 이문건 저, 이상주 역주, 앞의 책, pp.18∼29.

이문건은 매일같이 손자를 찾아가 건강 상태가 어떠한지 젖은 잘 먹는지를 손수 살피는 등 손자에 대한 정성과 기쁨을 숨기지 않았고, 손자의 성장과정을 기록한 『양아록(養兒錄)』까지 남겨 손자를 애지중지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전하였다. 1554년에 이문건은 며느리에게 다시 태기가 있자 아는 사람에게 점을 쳐 남아를 낳을 것이라는 답을 얻고서 기뻐하였다가 손녀를 얻자 크게 실망하였다.355) 이문건, 『黙齋日記』, 1554년 10월 15일.

17세기 초 경상도 달성군 현풍에 살던 곽주(郭澍, 1569∼1617)는 부인 하씨(河氏)가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인 경상도 창녕군 오야마을로 가자 초초한 마음에 편지를 보냈다. 이미 다섯 딸을 둔 곽주는 그 편지에서 “비록 딸을 또 낳아도 절대로 마음에 서운히 여기지 마소. 자네 몸이 편할지언정 아들을 관계치 아니하여 하네.”라고 쓰고 있다.356) 백두현, 『현풍곽씨언간 주해』, 태학사, 2003. 산모만 건강하면 아들이나 딸이나 상관없다는 이 편지에서 아들을 간절히 바라던 남편이나 산모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에는 아들 낳는 몸이 여성이 추구해야하는 가장 이상적인 몸이었고 아들 낳는 몸이 되었을 때야 최고로 선망받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며느리의 어짊으로 다행히 사내아이만 두게 된다면 어찌 우리 가문의 복이 아니겠느냐?”는357) 박석무 편, 앞의 책, p.69. 바람처럼 어질고 덕 있는 여성을 평가하는 잣대도 아들 낳는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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