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3. 치장하고 외출하는 몸
  • 치장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
정해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는 “양갓집에서 자라서 고관대작의 집에 시집가서 화려한 옷에 맛난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편히 잘 지내고, 부리는 사람이 충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안락하고 부귀하며, 살아서는 봉작호가 내리고 죽어서는 시호가 내리는 것, 이것이야 말로 부인네로서 지극히 귀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358) 유미림·강여진·하승현 옮김, 『빈 방에 달빛 들면-조선선비, 아내 잃고 애통한 심사를 적다』, 학고재, 2005, p.115. 곧, 화려한 옷과 좋은 음식에 부귀하고 명예로운 삶이 누구나 선망하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여성의 삶은 이와 다소 달랐던 듯하다.

전통시대의 여성은 남편과 자녀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몸의 욕구들, 예컨대 휴식, 레크리에이션, 음식에 대한 필요를 희생하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이 점은 여성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 완수나 가계 지원의 측면에서만 자신의 건강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틀에서 볼 때 여성의 사치를 통제하는 행위는 여성에 관한 일반적 규범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에서 오랜 기간 성별(性別) 분업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여성에게 강조된 사항은 가정 중심적인 여성상이었다. 여성에게는 주로 가정 안에서 가족을 돌보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규범에 따라 여성은 자신이 돌보야 할 식구보다 더 먹고 꾸미는 일이 탐욕이며 지나친 욕망이라고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 음악이나 화려하고 시끄러운 것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았다.”는359) 송규렴, 「先妣贈貞夫人順興安氏行狀」(조혜란, 이경하 역주,『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3), 보고사, 2006, p.144). 평가가 부덕에 대한 찬사였다.

더구나 부용(婦容)과 덕행이 강조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꾸미기는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범주를 넘어서지 말아야 하였다. 늘 여성의 치장은 ‘사치’라는 이름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여성들은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의복을 차리지 말고 추위에 얼지 아니할 만큼 입으면서”360) 『규범』(성병희, 앞의 책, p.101). 여성으로서 본분에 충실하도록 권장되었다.

이만부(李萬敷, 1664∼1732)의 아내 유씨(柳氏)가 “전부터 여자가 예쁘게 보이려 꾸미고 투기하는 것을 부끄러운 행동”으로361) 유미림·강여진·하승현 옮김, 앞의 책, p.180. 여기거나,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1832)이 봉숭아 물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듯이 꾸미기란 사회적 금기이자 부덕을 해치는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여성을 추모하는 글에는 검소한 모습을 추앙하는 기록이 곧잘 등장하였다.

부녀자들이 남편의 집안사람에게 귀여움을 받으려고 애교를 부리는 까닭으로 경쟁적으로 음식, 의복, 용모, 말씨 등을 치장하는데, 너의 어머니는 시집오는 날에 떨어진 농 두 짝이었으나 사람들은 가난하여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형제들과 섞여 지내는 곳에서도 얼굴에 화장기 없이 담박하였다.…362) 박석무, 앞의 책, p.63.

17세기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글도 주목된다. <충헌공가훈(忠憲公家訓)>으로 알려진 이 글은 윤선도가 큰아들 윤인미를 비롯한 자손에게 준 가훈이다. 이 글에서 윤선도는 아들에게 사치하지 말도록 경계하면서, “여성 의복은 나이가 많으면 명주를 사용하고 나이가 젊을 때에는 명주와 무명을 섞어 사용하되 무늬가 있는 비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여성의 옷차림이 화려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당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덕무의 경우는 여성의 멋내기에 대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이덕무는 18세기 여성들 사이에서 몸에 꽉 끼는 치마저고리가 유행하자, “지금 세상 부녀자들의 옷을 보면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요사스럽다.… 대저 복장에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들이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부인이나 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한다. 아, 예속이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모든 부인들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였다.363) 이덕무, 『청장관전서』 권30, 사소설 권6 부의1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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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기생 복장
일제강점기 기생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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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도 여성의 옷이 멋내기로 흘러가자 우려를 나타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상북도 안동의 선비 김종수(金宗壽, 1761∼1813)는 딸에게 지어준 『여자초학(女子初學)』에서 여성 복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당부를 하고 있다. “의복 제도 근세에 너무 적어 창녀의 의복과 같으니 그도 행실에 옳지 못한 일이라, 부디 맞게 하여 입어라.”라면서364) 『여자초학』(성병희, 앞의 책, p.31). 행여 딸이 기녀처럼 몸에 꽉 끼는 옷을 입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시대 여성의 치장은 부용이라는 명분으로 억제되면서 청결과 정숙이 최고 가치가 자리 잡았다. 여성의 미모를 불온시하고 여성의 근검과 절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꾸밈이나 치장을 사치 라는 이름으로 경계하면서 여성의 다양한 욕구를 제한하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교육서에 사치가 여성의 ‘덕’을 측정하는 가치 기준으로 들어선 이유도 여성의 치장을 금기시하고 억제하고자 하였던 조선의 위정자들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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