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3. 치장하고 외출하는 몸
  • 머리치장의 열풍
정해은

조선시대의 여성은 치장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치장을 서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경계선마저 넘나들면서 다양한 치장을 시도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 여성의 머리치장은 국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었다.

조선 후기의 여성들이 선호한 머리 형태는 머리숱이 풍성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여성은 머리숱이 많아 보이기 하기 위해 본인의 머리카락을 덧 땋거나 남의 머리카락을 덧 넣어서 머리 위에 얹었는데 결과적으로 높은 머리 모양새가 되었다. 이를 흔히 ‘높은 머리(高髻 또는 髢髻)’라고 하였는데, 본인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높인 머리를 ‘밋머리’, 남의 머리카락인 다리[月子] 또는 가체(加髢)를 이용해 높인 머리 모양을 ‘딴머리’라 하였다.

머리를 높게 하여 숱이 많아 보이게 하는 모양새는 중국 대륙의 영향으로 송·원을 거쳐 명에 전해져 조선의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였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이 높은 머리를 선호한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시경』에 실린 <용풍군자해로(鄘風君子偕老)>라는 시에는 위나라 의공(宜公)의 부인 의강(宜姜)의 아름다운 용모를 묘사한 부분이 있다. 거기에는 “구름처럼 숱이 많은 머리 / 어찌 다리를 쓰랴(鬒 髮如雲不屑髢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여성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 미인의 요건으로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365) 김진구, 「詩經에 나타나는 고대 중국인의 미인관」, 『한국생활과학연구』 9, 1990, pp.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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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 머리를 한 여성
가체 머리를 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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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견해로 이익의 발언이 있다. 이익은 “부(副)·편(編)·차(次)란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다리를 본머리에 입히는 것으로 머리를 이렇게 차례대로 엮자면 첩지[副笄]가 아니고는 꾸밀 수 없다. 평상시 꾸밈과 다르니 높은 머리 꾸밈[髻粧]이란 부인의 훌륭한 장식품이다.”고 언급하였다.366) 이익, 『성호사설』 권6, 만물문6 髻粧. 이익의 눈에 머리를 높게 꾸미는 치장이 특별한 날을 위한 꾸밈으로서 보기에도 좋았던 듯하다.

또 1757년(영조 33) 영조가 여성들에게 가체대신 족두리를 사용하게 한 후 여론을 조사한 결과도 주목된다. 체격이 작은 여성은 족두리를 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지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여성이나 머리카락이 빠진 노인여성의 경우 보기 좋지 않다는 평이 있어367) 『승정원일기』 1151책, 영조 33년 12월 18일. 다리의 사용이 외양상 보기 좋았다고 여겨진다.

조선 후기에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높은 머리의 시작은 왕실이었다. 인조대 이전에는 큰머리 대신에 주로 적관(翟冠)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적관은 만들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어 1623년 이후로 적 관 대신에 다리로 머리 수식을 만들어 예식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368)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 7월 6일 을묘6일. 이로 보아 궁중에서 다리를 쓰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중반 이후로 보인다.369) 강대민·권승주, 「영·정조대의 가체금지령에 관한 고찰」, 『문화전통논집』 12, 경성대학교, 2004, pp.135∼136. 현존하는 가례도감의 의궤들을 살펴보면 왕이나 왕세자, 왕세손, 공주의 혼례식에는 어김없이 큰머리로 꾸몄다.370) 손미경, 『한국여인의 髮자취』, 이환, 2004,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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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착용 모습-「회혼례도」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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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두리 착용 모습-안동권씨묘 출토 족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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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사용하는 머리 모양새가 민간에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이규경(李圭景, 1788∼?)은 큰머리의 유행에 대해 “조선 중기에서 1791년 이전까지 시속에서 가체라 부르는 큰 다리가 있었다.”고 보았다.371) 이규경,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首飾 「東國婦女首飾辨證說」. ‘중엽 이후’가 어느 시기인지 불분명하지만 여러 사료를 토대로 정황을 살펴보건대 17세기 중후반 이후라고 여겨진다.

민간에서 여성들이 궁중의 높은 머리 모양을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머리 모양은 점점 풍성하고 높아졌다. 머리치장은 양반 여성에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에게 ‘시대의 풍습’이라는 이름으로 번져나갔다. 여성들은 타인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다리가 불결하다는 비난도 개의치 않았다.372) 『영조실록』 권90, 영조 33년 12월 21일 기묘 ; 『승정원일기』 1019책, 영조 23년 8월 2일.

다리는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으므로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요가 늘어나자 머리카락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 때문에 “부자는 가산을 탕진하고 가난한 자는 인륜을 저버리기에 이르렀다.”는373) 『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신묘. 지적까지 나오게 되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다리를 살 수 없는 처지의 여성들이 가체를 훔치는 일도 생겨났다. 그래서 한성부에서는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하층 여성들이 시전에서 다리를 훔쳐갈 경우 시전상인들이 붙잡아 한성부나 관련 관아에 고발하도록 하였다.374) 『승정원일기』 1647책, 정조 12년 10월 10일.

다리를 이용한 머리치장 열풍은 한양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양은 사방의 본보기가 된다.’는375) 『정조실록』 권29, 정조 14년 2월 19일 경오. 지적처럼 한양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화 현상은 유행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1779년(정조 3) 경상도 선산에 거주하는 양반 노상추가 남동생의 혼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단 장수에게 신부에게 보낼 비단 옷감과 다리를 구매하였다. 노상추는 비단 치마저고리 값으로 21냥을 주고, 머리에 얹는 다리 3속(束)의 값으로 14냥을 지불하였다.376) 노상추, 『노상추일기』 1779년 11월 초4일, “錦帛商人來到 買婚需多紅廣織裳 草綠樂綾衣次 給二十一兩 戴髮三束 十四兩給之.”

그러나 머리치장이 열풍이 너무 거세지자 정조대에 강력한 철퇴를 맞게 되었다. 결국 여성들은 18세기 후반 국왕 정조의 강력한 제재조치에 따라 머리치장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다리는 점차 사라졌고 19세기에 오면 대부분 여성들은 쪽진 머리로 변모하였다. 이규경은 조선 후기 여성의 머리 형태에 대해 “순조 중엽 이후로 전국 부녀자가 다리로 머리 얹는 법을 없애고 자기 머리카락만으로 머리 뒤에 쪽을 지은 후 작은 비녀를 꽂았는데 이것이 그대로 풍속이 되었다.”고 고증하였다.377) 이규경,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服食類 首飾「東國婦女首飾辨證說」.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여성들이 새로운 유행과 치장을 창조해 내는 행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여성들은 정부의 엄격한 금령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 틈새를 비집고 금령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머리 형태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않았다.

1797년(정조 21) 정조는 대신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금령을 창출한 필요는 없으나 구법(舊法)은 지키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근래 가체 금령이 해이해지는 우려가 없냐고 묻자 우의정 이병모가 “큰 다리머리는 이제 금령을 범할 우려가 없습니다.”고 확신하였다.378) 『승정원일기』 1779책, 정조 21년 7월 8일. 그럼에도 이병모가 “사대부가에서 하는 작은 다리나 여항에서 혼인할 때 하는 머리 장식은 다 제거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부언한 설명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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