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3. 치장하고 외출하는 몸
  • 외출하는 몸
정해은

(여성은) 바깥을 훔쳐보거나 바깥 뜨락을 나다니지 말아야 한다. 나갈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만일 무엇을 살펴봐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 여성은 마땅히 집 안에 있어야 하고 되도록 도로를 나다니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나갔다가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야지 정면으로 누구를 봐서는 안된다.

위의 글은 『여논어』에 나오는 글로 조선시대 여성 교육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문구다.379) 송약소, 『여논어』 第1 立身, 제3 學禮 (이숙인 역주, 앞의 책, p.59, p.68). 예의바른 가정 교육의 원칙은 여성이 바깥세상으로 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강조하며 신선한 공기, 햇빛 등을 박탈한 채 어두침침한 방안에 있기를 요구하였다. 남녀의 공간을 구분짓고 여성의 몸을 감추도록 한 지침은 결과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몸을 구분하고 격리하는 장치 곧 ‘담’이 되었다.

1894년과 1897년 영국 지리학자로서 조선을 방문하였던 이사벨라 비숍은 『KOREA and Her Neighbours』(1898)라는 책에서 서울 여성에 대해 하층 여성을 제외한 대부분 여성은 집의 안뜰에 격리된 채 한 낮의 서울 거리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자정이 넘어서만 외출이 허용되었고 낮에 외출할 때에는 뚜껑이 덮인 가마를 이용한다는 인상기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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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를 탄 양반 마님의 나들이
가마를 탄 양반 마님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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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예상과 달리 조선시대 여성 ‘몸’은 사회적으로 그어놓은 경계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 활보하였다. 구경거리가 흔하지 않던 조선시대에 국왕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양반이나 하인 할 것 없이 길거리로 나와 행렬을 구경하였다. 국왕이나 사신 행차는 한 번에 수 십 명에서 수 백 명씩 동원되면서 화려한 의복과 의장을 갖추었으므로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었다.

구경꾼 안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양반 여성들은 거리에 모여 장막을 설치하거나, 누각의 난간에 기대어 구경을 하곤 하였다. 여성들이 머무는 장막 앞에는 화려한 채색 휘장이 둘러졌고 여성들은 그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담소하면서 행렬을 기다렸다.

양반 여성들은 미리 구경하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길가의 작은 집을 빌려 하루 밤을 지새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도 왕의 행차가 있을 때에는 길갓집을 임시거처로 삼아도 좋다는 허가증을 발행하였는데 권세 있는 남성들은 집안 여성들을 위해 이 허가증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일종의 입장권이었던 셈이다.380) 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 청년사, 2001.

1537년(중종 32) 3월 9일, 서울 관료 이문건의 집. 이 날은 명나라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오므로 임금과 명 사신의 행차가 예정된 날이었다. 부인과 딸은 새벽부터 이 행차를 보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부인과 딸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친정집 식구들과 어울려 아는 사람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이 행차가 잘 보이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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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는 여성들
구경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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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날 비가 오는 바람에 명 사신은 한양으로 들어오지 못하였고 이튿날 들어온다는 기별이 있었다. 이문건은 부인과 딸을 데리고 집에 오고 싶었지만 구경을 하겠다는 그들을 말릴 수가 없어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비가 어느 정도 개자 정오에 명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왔다. 이문건 역시 “행차를 구경하니 꿈만 같았다.”고 술회하였고, 부인과 딸도 이 광경을 구경하다가 저물녘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구경을 위해 하룻밤을 지새우고 돌아온 부인과 딸은 행차를 본 경험을 서로 앞 다투어 자랑하였다.

이상은 조선 전기 관료인 이문건(1494∼1567)의 개인 일기인 『묵재일기(黙齋日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일기에는 부인이 다시 구경하는 일로 친정집에서 자고 오자 이문건이 속상해하는 내용도 더 나온다.

위의 사례처럼 양반 여성들이 구경을 위해 밤을 지새거나 사람들 틈에 끼여 있다 보니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관료들은 “남녀가 한데 섞여 있다 보면 실행(失行)이 있을까 우려된다.”면서 구경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여성의 외출을 말릴 수 없었다. 1670년(현종 11) 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올 때 가마를 타고 구경하는 부녀자가 거리에 북적거렸다거나, 1727년(영조 3) 청 칙사(勅使)를 구경하기 위해 길가에 수많은 양반가 여성이 있었다는 실록 기사로 보아 여성들은 여전히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381) 『현종실록』 권18, 현종 11년 2월 병자 ; 『영조실록』 권11, 영조 3년 3월 갑오.

서울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이 있었다. 이 궁은 1623년(광해군 15)에 거의 완성되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여러 이유로 훼손되거나 철거되었다가 1648년(인조 26) 무렵에는 전각이 대부분 없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 인경궁 근방에 초정(椒井)이라는 온천이 있었는데 인목대비가 자주 행차해 온천을 즐겼다.

1630년(인조 8) 3월, 한양에는 인목대비가 도성 밖으로 나와 구경을 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조정의 관료들도 “옛날에 없던 일이다.”면서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그러자 인조가 직접 나서서 인목대비가 “성에 나아가 구경하였다는 말은 실로 거리의 허무맹랑한 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이 소문의 전말은 이러하였다. 인목대비가 지난 가을 초정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인경궁으로 행차하다가 모화관에서 실시하는 군사 훈련에 참여하는 국왕 일행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런데 인경궁 담장이 성과 가까웠고 성 밖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인목대비는 이 구경거리를 놓치기 않고 비·빈(妃嬪)들과 함께 성 위에 나와 구경하였는데 이것이 외간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인목대비는 초정으로 가는 행차를 멈추지 않았고 인조는 초정 근처에 맹수가 나타나지 않도록 훈련도감 군사를 시켜 주변을 수색하도록 조치하였다.

왕실 여성이 온천을 다녔다면 민간에서는 어떠하였을까? 1470년(성종 1) 성종은 충청도 온양 온천을 민간에게 개방하였다. 남쪽에 있는 온천탕은 재상 및 양반가 여성도 와서 목욕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볼 때 양반가 여성의 온천행은 공공연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1563년(명종 18) 광주(廣州)의 어떤 논에서 냉천(冷泉)이 솟아났는데 온천물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마 30여 채가 몰려들었고 여성들이 들에서 노숙하면서 온천물의 효험을 보겠다고 야단법석을 일으켰다. 심지어 나루터를 건너기 위해 서로 먼저 건너겠다고 다투다가 죽은 여성까지 발생하였다.382) 정지영, 「규방 여성의 외출과 놀이: 규제와 위반, 그 틈새」, 『한국의 규방문화』, 박이정, 2005, p.145.

이 한 바탕 소동으로 결국 그 냉천은 메워지게 되었다. 이후 일반 여성과 온천에 관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한 번에 30여 채의 가마가 행차하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여성이 외부에서 몸을 닦기 위한 온천행은 여전하지 않았을까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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