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1. 근대적 여성미와 여성의 몸
  • 교양미의 강조
신영숙

같은 맥락에서 여성의 정신미는 실용적으로 예의미, 동작미, 언어미, 품성미, 심정미, 자상미, 기술미 등으로 세분되지만,387) 이만규, 「여성의 미」, 『동아일보』 1938년 8월, pp.7∼11. ‘지혜로운 여성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교육을 통한 여성의 교양미를 의미 하였고 우선시되었다. 흔히 교양미란 정신적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건강미라면 대체로 육체미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사회주의자는 ‘젊은 여성의 육체미·실질미’를 생활 개선의 한 방안으로 제시하며, “오늘날 조선 여자들은 너무나 일시의 미, 장식의 미, 미봉(彌縫)의 미를 얻기에만 힘을 쓴다.… 그보다 더욱 영구한 미, 실질의 미, 근본의 미를 얻기에 힘쓰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388) 『신여성』 3권 2호, 1925년 2월, pp.21∼25 인용. 이는 정신미와 육체미를 구분하기에 앞서 통합적인 실질미를 찾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이데올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근대적 몸·미에 대한 언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남성미와 여성미를 하나의 인간미로 표현하는데 나름대로 주력하였다. 다만, 젠더적 인식의 수준에 따라 강조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의 몸·미가 일반적으로 중시된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이같은 사회 지식층의 여성 몸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당시 여성의 인식에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그에 대한 여성의 적극적인 반론이 없는 한 여성들도 그같은 인식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에 요구되는 미와 그를 위한 몸의 단련 등은 여성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근대 사회의 전제 조건으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근대적 몸과 미의 담론에서 외모 내지는 육체미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후기이긴 하지만 당시의 여성미에 대한 한 견해는 “과학적 기초 위에 자연을 무시하지 않는 인격이 고상한 화장(미)의 기본”이라고 정의한 후, 여성의 바람직한 화장은 곧 근대적 객관성을 가지는 동시에 전통적 개념을 내포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당시의 여성이 자칫 사치와 허영에 빠질 수 있다는 일종의 사회적 경고를 담아 여성의 비사회성이라는 일방적인 여성 비하 의식을 내비치기도 하였다. 식민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미가 단순히 도덕적인 잣대로 규정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의 도덕성은 개입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하였던 것이다. 이때 도덕성이란 바로 식민지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사회적 인식에 기반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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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형에 따라 연지를 매력있게 바르는 법이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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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여성 사무원의 자격의 하나로 몸에 대하여 “모양 덜 내는 것, 용모는 치장을 많이 하지 않는 것에 오히려 비중을 두고 의복은 분수에 맞는 정도” 등이 외국 잡지의 채용 표준을 인용, 소개되고 있다. 직장 여성의 ‘용모 단정’ 조건은 최근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 기대되는 것이다. 또한, ‘직업 부인들이 주의할 여러 가지 조건’에서도 여성에게 검소, 질박함 등 사회적 가치 기준에 따르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사회적 도덕성이란 기준에만 짜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사회적 도덕성 기준 자체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여성의 화장, 장식 등의 화려함을 일반 사회가 주의하고 경계할 만큼 여성 자신이 미에 대한 욕구가 커가고 인식도 이미 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적 여성의 몸·미에 대한 담론 속에 1920∼30년대에 패션, 미용, 화장(법) 등이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예컨대 여성의 미적 초점은 척선(脊線)미로 이동하고 있다 하고, 단발미 등 육적 의미의 여성미를 일층 고도화하려는 경향 속에 의상미도 역설되었다. 특히, 미용이 상업화되어 감에 따라 여성의 머리, 피부 관리, 화장법 등이 일상적으로 보급되고, 여성들 스스로 몸 가꾸기, 또는 꾸미기 등 사회의 일정한 근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불합리한 전통성에 저항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에로’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에로티시즘의 준말인 에 로는 에로틱한 감각이나 모습이라는 뜻에서부터 매춘 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가 폭넓게 쓰인 근대적 용어이다. 에로는 다시 “성적 애(愛), 육체의 곡선미, 도발적인 추파를 연상, 키스의 위생, 화장 위생 등”의 측면에서 상술되었다.389) KS생, 「에로위생학」, 『보건운동』 창간호 1932. 2. 1920년 포르노그래피, 여성의 나체 등 에로 사진 등이 신문 잡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30년대에 본격화한 것은 일종의 세계적 추세였으며, 상업적 광고나 성(학)의 발전에 편승한 에로의 범람 현상이었다. 당시 유행한 에로 사진은 위생과 함께 일제 식민지 지배를 위한 효과적인 통제술의 하나로도 활용됨으로써,390) 이경민, 「욕망과 금기의 이중주, 에로사진과 식민지적 검열」, 『경성 사진에 박히다』사진으로 읽는 한국근대문화사, 웅진싱크빅, 2008, pp.251∼266. 1930년대 일본에서 에로, 그로, 넌센스 등 이른바 근대적 취미가 수입, 유행되었다. 에로 청년, 에로 남녀, 에로 단체, 에로 서비스 등 ‘에로’를 폭넓게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성 몸의 상업화와 관리 통제는 맞물려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에로 위생학’이란 한마디로 여성의 건강한 몸과 미를 가꾸는 방법을 의미하기도 하며, 여성의 몸을 전제한 용어로 활용되었다. 남성 중심의 여성 대상화라는 인식을 여성도 순응 또는 거부하며 자신의 몸을 역시 활용해 나갔던 것이다. 심지어 성형 수술에서391) 「출세엔 첫째로 얼골이 중요…」, 『조선일보』 2011년 2월 15일자. 70년 전에도 코 높이기 수술이 유행하였다는 기사가 소개되어 있다. 1927년 5월 15일∼20일자, 1933년 12월 16일, 1937년 7월 3일자에도 외모를 가꾸기 위한 관련 기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손톱 화장에 이르기까지 여성 자신을 몸으로 구현해 보이기 위한 여러 가지 구체적 방안 등이 상업화의 물결을 타고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근대적 여성미·몸의 담론에는 에로 위생학과 의상미, 단발미(머리 스타일), 화장법 등이 포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구 스타일이 결코 배제할 수 없는 근대적 잣대이자, 담론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동시에 신여성은 여성의 몸이 곧 자아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개성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가히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대표적인 신여성이라 하는 나혜석과 김일엽뿐만 아니라 근대적 생활개선에 힘쓴 다순의 신여성들은 자신의 몸·미에 대한 근대적 자각과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여성에게 요구되는 몸에 대한 질박, 검소함만이 미덕이 아니라 나름대로 근대적 개성미를 추구하는 데 힘썼다. 식민지 사회에서도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보다 편안하고 아름답게 하려고 전신으로 부딪쳐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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