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2. 멋내는 여성, 활동하는 여성
  • 복식의 변화와 활동미
신영숙

여성의 몸에 대한 근대적 변화는 우선 의생활의 변화, 즉 의복 개량에서 쉽게 찾아진다. 구한말 개화운동 이후 지속적으로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한 의식주 개선 문제는 사회적 일대 과제였다. 흔히 민중과 여성의 전통적 습속은 개선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색의(色衣) 권장과 부녀 의복 개량 등이 중시되었다.392) 공제욱, 정근식 편, 『식민지의 지배와 균열』, 문화과학사, 2006. pp.22∼23.

식민지 조선에서 복식의 변화는 양장의 착용과 한복의 개량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어느 경우든 조선의 근대화 과정의 일환으로 서구적 외모를 상당히 수용, 추종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사회에서 ‘여성 생활과 문화’는 1920년대 생활개선운동, 1930년대 ‘합리화 담론’ 등으로, 1920년대 신여성의 출현이나 여성해방론의 대두 등과 맞물려 여성의 몸, 또는 자아정체성 등에 주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시기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여성 자신들의 의식도 크게 바뀌는 전환점에 놓인 것이다. 여성의 신교육 이데올로기인 일본식 현모양처주의에서도 여성의 몸의 발달이나 건강은 일층 강조되었다. 이는 대한제국 이래 여성 교육 전반에 걸친 사회적 요청이었고, 식민지 근대 사회로의 진입에 여성의 역할이 그만큼 중시되면서 여성의 건강한 몸이 여성 교육의 우선 과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특히, 여성의 몸을 전제하지 않고는 일제 시기 근대적 생활 개선 담론이 거론되기 어렵다. 당시의 의식주 개량이야말로 바로 여성의 몸과 직결되는 것이며, 여성의 올곧은 생활 의식이나 태도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부엌 개량만 해도393) 유영준, 「가옥제도와 부인의 건강」, 『청년』 5권 7호(부녀호), 1927년 6월, 『동아일보』 1926년 11월 1일자에 “가장 춥고 가장 더러운 곳”이 부엌이라고까지 쓰고 있다. 가족의 위생, 보건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뿐 아니라, 종래의 가부장제 가족의 식생활도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몸을 의식,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 개선의 주체는 바로 여성의 몸을 전제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여성의 몸·미, 다른 말로 외모에 직결되는 한복의 개량은 1900년대 말부터 논의되어 왔고, 그 중심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물동이를 이거나 일을 하다가 저고리 밑으로 가슴이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가슴이 드러나는 것을 그다지 민망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양장의 간편함을 본 따 겨드랑이에 닿아 있던 저고리를 길게 하여 젖이 보이지 않도록 가슴을 가리는 방법을 고안하는데 선교사의 부인들이 앞장섰다. 또한, 가슴을 꽁꽁 동여매어 입는 치마에 어깨허리를 다는 것에는 일반인들도 동의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개량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짧은 통치마는 한성고등여학교에서 1910년 흰 저고리에 검정 통치마로 교복을 정하는 데서 시도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 치마가 발목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아직은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가 배우고 활동해야 할 여성들은 간편함을 택하여 자연히 짧은 치마가 점차 확산되었 다.394) 박현숙, 「미국 신여성과 조선 신여성 비교 연구-복식과 머리 모양을 중심으로」, 『미국사연구』 28, 2008, 참조. 이때 간편함이란 바로 근대적 실용성, 합리성이며 여성의 몸의 요구와 사회적 요구가 맞닿은 지점에서 여성미가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1925년 『신여성』에 실린 풍자 만화에는 단발머리에 긴 저고리, 짧은 치마를 입고, 양산을 들고 하이힐을 신은 여학생 옷차림이 나오고, 1930년대의 여성이 개량 한복을 입고 구두에 짧은 양말을 신은 모습 등이 바로 그와 같은 예이다. 때로는 전근대와 근대가 공존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되기도 하였다.395) 최영수, 「진열장에 오는 여름」, 『동아일보』 1933년 6월 11일자 ; 안석영, 「만화폐지: 폭로주의의 상점가」, 『조선일보』 1934년 5월 14일자.

의복은 여성의 몸에 있어 ‘멋과 보호’라는 양면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신여성을 위한 의복 개량론은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의 아름다움의 표출 방법에 못지않게 자신의 일과 노동에 직결되는 것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옷은 신분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여 가족의 의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은 그 자체가 엄청난 고역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신여성들은 우선 자신의 활동에 불편한 의복 개량에 눈을 돌리고, 이어서 가족의 의생활에 빼앗기는 여성의 시간과 노동에도 주의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신여성들의 복식 개혁의 목적은 바로 근대적 실용성과 여성미 그리고 건강에 대한 고려 등이었다. 김원주가 의복의 3대 조건을 위생, 예의, 자태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구 부인들이 “가슴을 동여매지 않고 젖퉁이와 허리를 벌겋게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에 건강하다.”고 한 김원주는 자신이 직접 고안한 개량복 만드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몸소 이를 착용하였다. 또한, 나혜석은 한복의 선을 살리면서 전통적 색감을 개량할 필요를 강조하였다. 즉, 나혜석은 활동하기 편하고 바느질하기 편하면서도 한복 고유의 미감을 잃지 않도록 함으로써 여성 몸의 특성과 여성미를 살려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흰색, 검은 색을 배척하고 다양한 색채를 권장하여 일제의 균일한 교복 제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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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에 구두를 신고 개량한복을 입은 신여성이 책을 들고 있는 그림
단발머리에 구두를 신고 개량한복을 입은 신여성이 책을 들고 있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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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여성 의복 개량에는 남성의 일정한 동의와 지지가 있었다. “우리네의 의복은 신체 발육과 자유 동작에 장애가 없지 않다.… 그뿐 아니라 풀을 먹여서 죽어라 하고 다디미질을 하여 풀칠한 백지장 같은 옷을 걸치는 것이 공기 유통에는 이해관계가 미친다 할지라도 제일 몸을 동작하는 데에 거북살스럽고 쉽게 상하는 폐가 있다.”고396) 안석주, 「미관상으로 본 조선의복」, 『신여성』 2권 1호, 1924년 11월, pp.6∼10. 개량을 권장하였다. 그밖에도 치마 저고리의 길이뿐 아니라 옷 무게가 너무 무거워 비활동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버선 대신 양말, 신발 개량 등도 거론하였다. 흰색의 동정도, 두루마기 고름도 없애야 한다는 세심한 주의도 기울였다.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의복의 미는, 첫째 개인의 용모, 체격, 연령, 신분에 따른 색채, 무늬, 혹은 체재(體裁) 등, 둘째 같은 재료로도 솜씨에 따라 달라지는 미, 셋째 의복에 부속되는 모든 복식의 조화 등이 제시되었다. 여기에는 도덕성의 문제보다는 신분에 맞는 조화미, 또는 개인의 개성미, 객관적인 미가 강조된 셈이다. 결국 여성의 몸을 근대적 객관성, 즉 서구적 편의성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복 개량의 첫 번째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든 여성의 몸을 의복에서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성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다 활동적이게, 더나가서는 여성의 노동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는데 있었다. 몸을 아름답고 생활에 편리하게 하지 않는다면 개량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은 신여성의 의복 개량 논의는 구두와 머리에도 적용되어 파마와 단발, 양산, 모자, 장갑, 혁대 등의 액세서리에서도 서구화를 선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팬티 같은 속옷, 목도리, 양말뿐만 아니라 수영복, 정구복, 야구복, 기계체조복 등 여성운동복 등도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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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지에는 브라우스 유형별 디자인을 소개하는 등 여성의 복식미에 관심을 보였다.
여성지에는 브라우스 유형별 디자인을 소개하는 등 여성의 복식미에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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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흐름에서 1930∼36년의 의복 문화는 파마, 화장과 함께 양장으로 많이 바뀐다. 1934년 조선직업부인회가 개최한 여의감상회, 오늘의 패션쇼에서는 가정복, 작업복, 나들이옷, 연회복, 문상 때 옷, 수영복, 운동복, 개량한복397) 이때 개량 한복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는 듯하지만, 지금도 개량 한복은 정착하지 못한 감이 있다. 등 양장 유행이 활기를 띤다. 당연히 여성들은 복식미의 창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모자, 장갑, 숄, 파라솔, 구두 등에서 색의 조화를 추구하기도 하고, 양장에 하의가 짧아져 각선미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말기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동원되는 여성’의 몸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이른바 ‘몸뻬’이다.398) 안태윤, 「일제말 전시체제기 여성에 대한 복장 통제」, 『사회와 역사』 74, 2007 참조. 중국 팔로군의 여성복인 일본의 몸뻬는 여성 몸에 대한 국가 통제가 의생활에 직접 반영된 것이다. 일종의 바지, 몸뻬는 활동적이고 보온성이 높아 눈이 많은 지방에서는 남녀 모두가 입었다. 몸뻬가 검소하고 활동이 편리하다는 이유에서 조선 여성들도 입기를 강요당하여 여학생을 비롯, 일반 여성 모두의 의복이 되어갔다. 1938년 경부터는 도시에서도 작업복, 또는 방공 연습 때 착용하였으며, 1942년에는 ‘부인 표준복’내지는 ‘활동복’으로 지정되었다. 1943년에는 ‘결전복’으로 착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철저하게 보급되었다. 결혼식에서 까지 부인회가 제정한 부인 표준복으로 지정해 입을 정도였다고 하니, 이제 의복을 통한 서구적, 근대적 여성미란 퇴색하거나 왜곡 일로에 놓여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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