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2. 멋내는 여성, 활동하는 여성
  • 단발과 구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대적 스타일
신영숙

여성의 몸에 대한 근대적 관심 또는 스타일은 단발로 머리에서 더욱 가시화되어 갔다. 단발은 갑오개혁 시기 국가적 정책으로 시행된 것이었지만, 여성의 단발에 대한 인식은 1920년대까지도 그리 긍정적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단발한 개인이 언론 지상에 오를 만큼 사회적 관심은 컸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

단발은 ‘스타일로서의 근대-몸의 정치학’으로399)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 나무, 2000, pp.179∼182. 설명 가능하게 되었으며, 모던 걸을 ‘모단(毛斷)’으로 표현할 정도의 근대적 상징 그 자체이었다. 그러나 단발이 기생과 신여성 사이에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일반 사회는 단발한 신여성을 흔히 탕녀로 매도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여성 사회의 열망은 꺾이지 않았다. 다만, 의복 개량에 비해 남성들의 반대가 컸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간섭 또는 억압을 단발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당시 기생 또는 근대적 서비스직 여성과 신여성 사이에 있을 법한 근대적 스타일에서 큰 차이는 있을 게 없었다. 이미 3․1운동에도 이들이 여성이란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함께 참여하였듯이 식민지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저항 또는 반발에 비슷한 정서가 흐르고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단발랑(娘)”의 효시는 기생 출신으로 나중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한 강향란이다. 그녀는 실연의 아픔을 단발로 씻어 지우듯 1922년에 남장하고 남학생과 같이 수학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또다른 한 카페 여성은 직업 전선에서 남자같이 씩씩하게 보이고자 단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단발이 여성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의 변화를 추구하는 한 표지이자 이미지로 기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염상섭 등 남성 지식인들은 거친 비난을 거듭하였으며,400) 김경일,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푸른역사, 2004, p.186 ; 오므브, 「기생과 단발」, 『장한』 창간호1927년 1월, pp.32∼34. 특히, 사생활로 비난 받는 여성들이 주로 단발 여성이라는 비판 속에 단발에 대한 일반 사회의 반응은 더욱 부정적이었다. 단발에 대한 사회적 반대는 “아직까지도 단발은 진한 루즈, 에로, 곁눈질 등과 함께 카페의 웨이트리스나 서푼짜리 가극의 댄스걸들의 세계에 속한 수많은 천한 풍속들 중의 하나”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401) 무명씨, 「미쓰 코리아여 단발하시오」, 『동광』 1932년 9월. 이와 같이 사회 일각에서는 여성의 단발을 감정에 이끌려 한 경솔한 행동으로 비하하거나 아니면 여성답지 않은 모습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구미의 잘못된 유행을 받아들이는 행동이란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즉, 여성의 단발은 용인될 수 없는 사회적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배우 이월화, 김명순 등 신여성(운동가)들은 단발에도 앞장섰다. 주세죽, 허정숙 등 사회주의 지식인 여성은 물론 김활란, 차미리사, 신알베드 등 기독교 자유주의계 여성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김활란은 오랜 고심 끝에 뒤늦게 단발하였고, 나혜석은 결혼 후 파리여행을 갈 때에야 단발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면서 다시 단발을 버렸다고 한다. 여성계에서는 이미 단발이 미관, 경제, 위생면에서 다 좋다는 데 대체로 동의하였다. 일반 사회에서도 시대의 추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개인의 의사에 맡긴다는 것이 주류였다.

1920년대 미용에는 단발 등 계몽의식이 작용하다가, 1930대 이 후 미용 문화의 확산으로 근대적 의식과 외양의 변화는 일반 사회에 더욱 스며들어 갔다. 단발에 이어 머리 염색, 파마 등 헤어스타일에 대한 여성의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1920년 미용실이 등장하면서 유행하게 된 서양식 파마는 오히려 단발만큼 시빗거리가 된 것 같지는 않다. 화장에 관한 글과 각종 광고는 일상생활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거나 나름대로 창의성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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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단발여성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은 여성의 단발을 특집처럼 다루고 있다. 학교측, 사회측 남녀 의견들을 다양하게 소개한 것이다.
표지에 단발여성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은 여성의 단발을 특집처럼 다루고 있다. 학교측, 사회측 남녀 의견들을 다양하게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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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생활 개선을 주도한 여성들은 단발 실천에 적극적이어서 ‘남자의 상투 끊는 데’도 위력을 발휘하였다. 1927년 2월 전라남도 순천군 쌍암면 부녀진흥회는 농사 개량과 지방 경제 진흥 사업을 실시하면서, 마을에서 상투한 남자가 한 명도 없게 하였다. 이렇게 당시 여성이 생활 개선의 주체로 앞장섰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만큼 그 문제가 절실하였다는 것과 가정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비중이 가볍지만은 않았음을 잘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신여성의 몸을 위한 근대적 외양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식 스타일로 모자, 양산, 양말, 장갑, 안경 등의 착용을 꼽을 수 있다. 이를 테면 신여성의 지적 용모를 상징한다는 금테 안경은 당시 신흥 고급 ‘매춘부’의 복장에서도 이용되었다. 기생, 카페 걸 등 근대적 서비스직 여성 사이에 여성 미와 몸을 위한 이른바 패션에서 신여성과 별 차이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그 때문에 더욱 강화된 점도 물론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성의 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성의 발과 직결되는 구두이다.

오이씨 같은 발을 사나이들이 좋아하였습니다. …

서픈 짜리 고모신이 웬일입니까. …

여름에도 솜버선을 신든 그 발을 활신 벗고 마루에서 성성거려도 부끄럽지 않은 때가 왔습니다.

양말을 치켜 신고 가벼웁고 튼튼한 맵시 있는 구두를 신고 뚜벅뚜벅 아스팔트 위를 걸어다니고 급한 일에는 길로 다름박질을 해도 누구하나 손구락질 하는 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활발하고 튼튼해졌습니다. 그것은 당신들의 발에 자유가 온 까닭입니다.

완전히 사나이들의 노리개 감은 아닙니다.

구두를 신고 길을 다나오십시오.…(정순애, 「구두」, 『여성』 2권 2호, 1937년 2월)

근대적 여성의 자긍심은 발의 해방을 위한 편한 구두의 착용에 비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대받던 여성의 지위는 여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고무신과 버선에서 양말과 구두로, 활동적인 패션으로 변화함으로써 달라져 갔다. 구두야말로 여성의 신직업인 여기자, 전화 교환수, 여 은행원, 버스 걸 등의 몸에 걸맞은 것이었다.402)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구었는가』, 생각의 나무, 2000, p.185. 서양식 복장은 신여성들의 몸에 대해 실용성의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있었지만, 또한 신분과시적 성격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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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의 모습은 당시 남성의 대단한 눈요깃거리이기도 하였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여성의 모습은 당시 남성의 대단한 눈요깃거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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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구두는 근대 여성의 새로운 성적 매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 사회적 외적 요인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였다. 남성들은 단지 드러난 종아리, 맵시 있는 구두의 (높은) 굽에 시선을 보냄으로써, 남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로 변질되기도 하고, 일상의 유행 속에 여성을 지치게 하였기 때문이다. 서구식 문화 주택, 문화 생활을 동경하는 여성 생활의 변화 속에 여성의 몸은 외양에서부터 먼저 달라져갔고, 근대적 의식의 성장과 함께 여성의 정신과 몸은 외양에서부터 혼란과 괴리를 경험해 가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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