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2. 멋내는 여성, 활동하는 여성
  • 스포츠와 여성의 건강미
신영숙

건강한 인간다운 몸을 위해 근대적 운동과 체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개화파 인사인 유길준이 역설한 바 있다. 근대적 여성미는 체조 등 스포츠를 통해 일상화 구체화된다. 지금도 흔히 유산소 운동이라고 각광을 받고 있는 ‘걷기’가 이때 이미 강조된 것이다. 근대 여성은 체질, 체위, 체력 등 몸을 잘 가꾸어야 일도 잘할 수 있음을 여성 스스로도 인식하게 되었다.

체위 향상에 있어 여러 가지 좋은 운동이 있으나 그 중에도 제일 좋은 운동은 걷는 운동입니다. 걸음은 걸을수록 더 잘 걸을 수 있고 겸하여 동작이 민첩하여 집니다.403) 김신실, 「행보와 건강, 걸음쩨가 좋아야 맵시도 나고 몸에도 좋아」, 『여성』 5권 12호, pp.74 ∼75.

오늘 현대 여성의 미의 표준은 부분 부분을 종합한, 즉 윤곽의 아름다움 건전한 체질과 발육된 근육 이것이 잘 조화되고 여성 특유의 곡선미를 표현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 운동으로 만든 몸이라야 어떤 일터에서든지 무슨 일감이든지 내손으로 만들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체질부터 완전히 만들고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이 스 스로 되기에 힘쓰는 것입니다.404) 박봉애, 「여성체격향상에 대하여」, 『여성』 2권 1호, 1937년 1월, pp.32∼34.

곧, 여성의 몸이 근대적 스타일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운동이 여성의 몸이나 미에 필수 요건이란 인식이 부각되면서 여성 단체들은 여성 건강을 위한 원족(遠足, 오늘의 소풍과 같음) 행사 프로그램 등을 선호하여 유행시켰고, 여성 스스로 원족회도 만들어 자신들의 몸 만들기 또는 몸 가꾸기를 위한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것은 여성의 흥미도 촉발시켜 회합에 대한 관심과 동기 유발에도 유용하였지만, 그보다 기본적으로 여성들에게 즐거운 외출과 유희, 그리고 여성의 건강미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제 여성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 자신의 스타일을 위해 운동과 체력 단련을 하도록 권장되었다.

신여성, 여학생들은 때로 스케이팅을 하러 한강변으로 나가기도 하고,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가 세운 충청남도 공주 영명학교에서도 동아일보 주최 여자정구 시합에 나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선수들이 나왔다. 1920년대 이미 ‘여자의 체질에 적합한 운동 경기’로 수영, 원족, 등산, 체조, 체육 댄스, 테니스, 발리볼, 바스켓볼, 육상 경기 등이 여성 스포츠로 다양하게 소개되곤 하였다. 당시 여론을 선도하는 잡지 등 언론이 여성의 몸과 건강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고, 이는 바로 당시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사가 발행한 여성지 『신가정』이 주최한 ‘여자체육문제좌담회’(『신가정』 1933년 9월)에서는 “체육 문제가 민족, 사회 문제에 영향을 미친다.”면서 여자 체육의 필요와 효과는 바로 민족의 모성과 맞물려 부각되었다. “옛날에는 여성의 일이 운동에 버금갔지만, 이젠 의식적으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데 대부분 동의하면서 학교 운동을 통한 체력 향상을 강조하였다. 즉, 근대적 여성운동이 시 작된 10∼20년 전에는 나막신 신고 바스켓 볼을 하고 짚새기 신고 베이스볼도 하였다며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반면 여자 체육의 폐해가 거론되기도 하였다. 이를 테면 경기와 체육을 구분하여, 선수권만 보고 무리하게 경기에 임하는 것은 해로우며, 체질에 맞춰 지나치지 않게 운동할 것이 강조되었다. 더욱이 체육으로 말괄량이가 된다는 우려는 잘못이라는 지적과 함께 신체 구조가 발달하는 게 확실하다는 등 당시 여성 스포츠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고도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수영의 풍기 문란 문제도 단체로 하는 건 괜찮은데, 개인 운동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선수 스스로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등 진지한 충고도 때때로 제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운동과 경기’(『동아일보』 1926년 1월 9일자)에서는 운동하는 여자는 다리가 굵어지고 피부가 거칠어지며, 성미가 남성적으로 된다는 등 부당한 오해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의 일정한 반대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운동은 여자의 미를 돕는 것이며, 골격이 골고루 발육된 육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고 운동의 필요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가정 부녀들도 체육-운동에 관심을 갖고 클럽 등을 이용하였는데, 장소와 시설이 문제였다. 몸·건강미의 필요성에 동감하고, 특히 공장 여성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운동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따로 운동하기란 분명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학교에서 테니스, 베이스볼, 바스켓볼, 핑퐁, 러닝 등을 할 수 있었는데, 과격하지 않은 편인 발리볼이 적당하다고 권장되기도 하였다. 동시에 공부도 병행하여 몸만을 가꿀 문제가 아니라는 당시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몸과 정신이 함께 건강해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 미국 여자체육연맹의 선언서 12개 항목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을 이른바 스포츠맨 정신이 몸의 건강과 스포츠 인식에 직결됨을 계몽, 보급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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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7월 제1회 전국여자정구대회
1932년 7월 제1회 전국여자정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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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여자정구대회 참가 선수
전국여자정구대회 참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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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포츠 중에는 당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여학교 정구대회가 1920년대 사회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일제의 1911년 ‘여학교 규정’ 속에 이미 여학교의 체조, 무용 등 운동 시간이 구체화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경기를 가능케 한 사회적 토대가 되었다. 이같은 여자정구대회는 근대적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여자정구 결승전은 금일’(『시대일보』 1924년 6월 23일자)이라는 기사에는 “제2회 전선(全鮮)여자정구대회에서… 나비 같이 나는 듯 춤추는 듯 경쟁에 백열된 각 여학교 선수의 모양은 아름다운 중에도 장쾌하였는데…” 처음에는 남학생 출입이 금지된 운동장에서의 경기가 남학생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고, 구경하러 몰려온 인파는 경기 못지않은 장관을 이뤘다. 또한, 1932년 경성부(서울)에 나타난 자동차 인력거, 전화 교환수, 제사 여공 등 서울을 묘사한 기사 중 ‘여학생 체조’란에는 체조에서 보이는 여성의 몸을 신기한 듯, 그러나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호리호리한 다리를 갑븐갑븐하게 처들며 파란 리본으로 이마를 꼭 매고 햇빛에 방실방실 웃으며 뛰노는 여학생떼-누구라 긴치마에 장옷 입든 시절을 상상이나 할 것이냐! 하아 점푸 한번에 산이라도 넘을 듯! 공을 던지는 힘센 팔로는 돌이라도 부술 듯! 생글생글 웃는 미소! 쾌활한 웃음은 봄의 생기를 대지에 흩어주고 있다.405) 『신동아』 1932년 6월, pp.65∼71.

이보다 앞서 경성의 ‘자전차 탄 여자’는 “구리개(황금정) 네거리, 종로편에서 자전거 한 대가… 그 위에는 양장 미인이 실렸다. 참으로 미인이다… 안장 위에 펑퍼짐하게 놓인 위대한 꽁무니는 자꾸 (호박 같은) 다리를 기적적으로 움직여 바퀴를 돌린다….” 여성의 몸과 행위에 대한 이같은 묘사는 당시 자전거를 타는 여성이 그만큼 희귀하여 주목받은 존재였으며,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의 당연한 표출이었다 하겠다. 또한, 거의 10년 후에는 자전거 사고가 남자보다 많은 이유를 “부인의 성능이 남자보다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경험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하여, 그만큼 근대적 여성관이 진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남녀에 대한 젠더 인식은 때로는 동등한 인격체로 상호 존중하는 듯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여전히 성별 역할 분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 보다 보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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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전라북도 고녀생득이 체육대회 때 대창놀이 체조를 선보이고 있다.
1940년 전라북도 고녀생득이 체육대회 때 대창놀이 체조를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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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일제의 전시 체제에서는 체육 강화를 통한 여성 교육 아래 여성의 몸은 말 그대로 ‘굳센 여성, 억센 어머니’를 뜻하는 것이었다. 검도, 유도, 궁도, 스키, 스켓, 치도 등 무술까지 여성들에게 강유(剛柔) 양방으로 신체를 단련시켰으며, 1942년부터 만 18세와 19세 남녀에게 체력 검사가 실시되었다. 이는 건강한 모체를 기른다는 목표 아래 수영, 행군 등 지구력 강화를 위한 여자의 심신 단련이 남자보다 더욱 필요함을 강조한 탓이다. 즉, 여성의 몸을 관리 통제한 총독부는 관제 여성 단체를 활용하여, 신체 단련에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이같은 체조를 ‘사회 교화 사업’의 하나로, ‘황국 신민’으로서의 전 민중에게 보급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406) 안태윤, 『식민정치와 모성∼총동원체제와 모성의 현실』, 한국학술정보, 2006.

근대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으로 조금씩 인식되기도 하였지만, 대한제국기부터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몸으로 한층 강조되었다. 그 안에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가꾸고자 하는 노력도 조금씩이나마 계속되어 갔다. 결국 근대적 여성 스타일을 향한 과학화, 합리화의 길은 힘겨웠지만 여성의 몸·미의 근대로의 변화는 점차 진전돼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을 실현하기에는 전시 체제 등 현실의 벽은 너무나 두터웠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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