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3. 여성의 건강과 민족의 모성
  • 임신과 산아제한
  • 1. 임신과 출산을 위한 모성
신영숙

근대에 와서도 전통 사회 못지않게 여성의 몸은 임산부로서 중시되었다. 결혼관이 자유 연애 등으로 크게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해도, 모성으로서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은 별 차이가 없었다. 특히, 부국강병을 통한 근대화를 위해 강조된 모성은 일제시기 내내, 그리고 후기로 갈수록 오히려 객관적 사회적 조건에 부합할 따름이었다.

여성은 근대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국가의 동량이자 자산이 되는 자녀를 잘 낳아 잘 키우는 어머니, 남편을 적극적으로 내조해야 할 아내로 여전히 안사람으로 기대되었다. 국가와 사회, 민족의 모성으로 그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일제에 의해서도 현모양처, 여성의 몸으로 더욱 강화될 뿐이었다.

이는 1920년대는 신여성의 자각이란 측면에서는 상충하는 점도 없지 않았지만, 3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여성의 몸은 전시 체제의 엄격한 관리와 통제 대상으로 국가와 사회의 조명을 크게 받는 것이었다. 즉, 전시 하의 인력 충원 등 인구 정책에 따라 여성 정책내지 모성 정책은 여성을 지속적으로 대상화하였다. 부녀자의 알아둘 일이란 고작 산전조리법이나 ‘약한 부인과 임신’ 등에 관한 것이었으며, 순산을 돕거나 난산을 구하는 중요한 사명을 맡은 산파 등이 1920년대 초부터 언론의 주요 관심거리였다.

심지어 여자가 고등교육을 받으면 생리적으로 쇠퇴한다는 잘못된 관념까지 나와 여성을 교육시키지 않으려는 사회 풍조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전문직 지식인들조차도 여자의 고등 교육이 결혼과 생식력에 해가 된다는 곡해를 주창할 만큼 모성을 위한 여성 대상화의 폐해는 심각하였다. 이는 어쩌면 조선총독부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과 출산 통계 등을 제시, 설명하며 모성 동원에 혈안이 된 사회상을 알게 모르게 반영한 동시에 오히려 그에 반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모성으로서의 여성을 위해 1920년대 ‘성교육의 주창’에서는 왜곡된 성의식이나 성욕의 금기화가 가져오는 부작용 중에서도 특히 화류병의 만연, 사생아의 증가, 낙태, 영아 살해와 유기, 그리고 온갖 비행(동성 음행 등) 등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산부인과 여의사, 산파, 간호부 등 전문직 여성의 등장은 여성의 임신 출산 등에서 사생아를 줄이고, 임산부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당연히 기여하였다. 여성의 몸에 대한 생각은 여성해방론의 영향으로 피임과 산아제한론도 등장하여 논란거리가 되었다. 직업 여성의 노동 조건 등에서도 모성으로서의 여성 몸은 거론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여성의 몸은 여전히 자신만의 몸이 아닌 사회적 일개 존재로 출산과 노동을 위한 여성의 몸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결혼과 임신, 출산 등은 곧 일제시기 가족과 사회의 일로 관리 통제 대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건강진단이나 화류병과 생식기 기형을 언급하며, 특히 여성의 경우 폐결핵, 심장병이나 신장병 환자는 결혼불가로 금기시되었고, 배우자의 유전과 연령에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또한, 초야에 대한 예비 지식 등 성문제와 관련해 적극적인 설명도 나오고 있었으나, 정작 여성의 몸 자체는 점차 부차적인 것으로 뒷전에 밀려났다. 1930년대에도 결혼과 유전 등에 관한 의학 상식적 글들은 국민내지는 여성 계몽에 계속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9년 출산 상황부터 매년 매월 출산 통계를 발표하며 출생수, 출생율의 도별 통계, 출생아의 체성(體性), 출생의 계절, 사산(死産)의 수, 누년 비교, 각 도의 사산율, 사산아의 체성, 사산의 계절 등을 분석 관리하며, 이에 따른 임산부 여성의 몸에 대한 관리, 통제를 늦추지 않았다.

이는 이미 1900년 전후시기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위한 여성의 몸이 이제 전혀 다른 차원, 즉 전쟁 수행을 위한 식민지의 도구화가 되어갔음을 의미한다. 즉,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갈수록 국가 통제의 대상으로 ‘민족 융성의 열쇠는 여성이 쥐고 있다’는 대전제 아래 여성의 몸이 약한 원인을 진단하고 그 처방을 위한 사회적 담론이 활발하게 조성되어 갔다. 때로는 “여성이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약한 존재로 인정되어 온 것은 남성과는 달리 여성의 심신 발달이 다방면으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 뇌세포 자체가 열등하기 때문은 아니며, 오히려 그 하나하나의 것은 남자보다 뛰어나다.”는 언론의 나름대로 객관적인 진단이 등장하는가 하면, ‘모성 자체야말로 민족의 어머니이다.’라는 미명 아래 여성에 앞서 모성의 위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마치 ‘모성 불가침’, 또는 신성시되는 모성 담론이 기승을 부리곤 하였다. 이로써 여성의 몸은 자신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사회적 모성이란 도구로 어렵잖게 전락하고 있었다.

자녀의 지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어머니이다. 현재 세계를 주 도하고 있는 ‘남자’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유전을 받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를 무기로 하여 무조건 여성을 집안에 얽매이게 하는 것보다는 민족의 육성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을 아끼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데 초점이 놓인다. 또 여성 자신도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열쇠를 스스로가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좀더 각성해야 할 것이었다.410) 「민족융성의 열쇠는 여성이 잡고 있다(3)-모성자체야 말로 민족의 어머니이다」, 『동아일보』 1935년 8월 18일자.

이같은 사회적 요구에 여성은 내몰리고 스스로 이를 내면화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국가와 사회, 또는 전쟁이 요구하는 남아를 잘 낳아 잘 키우는 게 여성의 몸에 할당된 몫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담당해야 하는 여성의 몸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였고, 자신의 몸을 돌아볼 여유란 있을래야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여성이 ‘최후의 식민지’화되어 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성의 모성과 노동의 상충 문제는 ‘노동부인 보호’라는 표어 아래 산전 4주일, 산후 6주일을 쉴 수 있게 한 일본의 ‘부인 노동 보호 개정법’으로 그 실마리를 푸는 듯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같은 법은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였다. 공장법조차 없어진 상황에서 직업 여성의 불임 경향은 오히려 증가할 뿐, 이들을 구제할 길은 막막하기만 하였다. 총독부의 여성 정책은 바로 노동 정책에 배치되는 것으로 그 모순을 뚜렷이 드러낼 뿐이었다. ‘낳아라, 불려라’ 하는 정책의 사회적 조건은 열악하기만 하였으나 식민지 여성 스스로 그에 저항하기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한편, 이미 구한말에서부터 잉태한 부인의 조섭하는 법이 나온 후 1930년대 후반에도 임부의 섭생법에서는 수태, 입덧, 영양물, 임신 중 동거 문제, 농촌 부인의 임신과 영양, 영양 강좌 등이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태아 사망, 유산, 조산 등에 주의할 것이 지적되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도 의학상 경고 조항에 해당하였다.

그밖에도 분만 예정일과 남녀 감식법, 산후 조리와 산전 산후 섭생 등이 언론에 계속해서 거론되곤 하였다. 초임부의 주의 사항으로 음식물, 대소변, 신체의 청결, 의복과 운동, 정신 수양(태교 포함), 난산과 상상 임신, 해산 후 자궁이 아래로 빠져 나오는 일(자궁 탈출) 등이 자주 지적되었다. 민간 요법 등 임산부의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소개되곤 하였다. 예컨대 산후 6주간 정도는 반드시 조리가 필요하다면서, 몸의 원상 복귀를 위한 효과적 운동도 제시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사회적 교육은 그만큼 여성의 몸과 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드러낸 동시에 여성의 주목을 끌어내 다산 정책의 효과를 올리겠다는 정치 사회적 의도가 다분히 내포된 것으로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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