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3. 여성의 건강과 민족의 모성
  • 임신과 산아제한
  • 2. 산아 제한, 피임과 낙태
신영숙

근대 모성의 범주 안에 1920년대 피임, 산아제한 등도 우생학적 고려와 함께 등장한다. 여성 해방 입장에서 피임, 산아 제한론은 당시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였지만, 그에 대한 사회 인식은 아직 미흡하였고, 오히려 우량아를 위한 모성 관리 통제는 전보다 더 강화되어 갔다.

매스컴을 통한 산아 제한 찬반 양론이 격렬한 가운데 산아 제한은 주부의 보건, 건강 유지와 화목한 가정 생활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제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동시에 여성의 몸과 관련하여 정조, 결혼, 이혼, 낙태 및 간통, 여자와 독립 정신 등 5개항의 법규 안에서 사회적 이슈가 설명되었다. 그리고 무산 계급의 피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 방법을 소개하는 등 당시의 성교육과 피임법은 시대적 요구라고 역설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산아 조절내지는 산아 제한의 실행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영구적 방법과 일시적 방법 등이 소개되는가 하면 렌트겐 거 세법, 수술적 피임법, 배란일 산정에 의한 피임법 등 구체적이며 자세한 내용이 언론에 연재되곤 하였다. 당시 콘돔은 일본에서 군대 성병 예방을 위한 ‘유해 피임 기구 취체법’이 공포된 이후에도 다른 피임 기구와 달리 허용되고, 조선에서도 전시기 내내 콘돔의 판매 광고는 『매일신보』에 빈번히 게재되었다. 다만, 비싼 탓에 일반인은 쉽게 살 수 없었으며, 유산 약도 나오긴 하였지만 지극히 일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쨌든 낙태와 피임을 금지하고 건강한 모성을 유지하는 것은 일제 시기 여성 정책의 핵심적 과제이었다. 때문에 여성 질병에서도 월경, 냉, 대하 등 여성병과 임질 등 성병에 특히 관심이 기울어졌다. 이는 우생학적 입장에서 모성과 양육 등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관심에 비례하여 중시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여성들 스스로 산아 제한 등에 기대와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근대적 직업 여성의 증가에 따라 직업병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연초 공장 여공의 흡독 고역, 고무 공장 여공의 협통 요통, 제사 공장의 기진 역진(氣盡力盡) 등 여성의 직업병에 대한 관심은 과도한 노동 문제와 열악한 노동 조건 등에 눈을 돌리면서 적극적으로 거론되었다(『동아일보』 1925년 1월 1일자). 이는 여성의 몸이 모성과 양육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이처럼 여성의 건강미는 곧 여성의 질병 퇴치와 예방에 직결된 것으로 여성의 의식화와도 맞물려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 변화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1930년에 ‘유해 피임 기구 취체 규칙’ 발표 이후 산아 제한론을 탄압하는 가운데 피임 기구와 약품 사용이 금지되었다. 1940년 ‘국민우생법’이 공포되면서 장애자 출산을 방지하였고, 산아 제한과 인공 임신 중절을 적극적으로 금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낙태에 관여한 여성과 의사는 당연히 처벌되었으며, 산아 제한 운동을 벌이는 여성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체포되기도 하였다. 임산부는 모성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하는 것으로 칭송되었고, 출산 중 산부가 사망해도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고 억지로 찬양되고 강변되었다. 이처럼 여성에 대한 출산 정책이 법제화하여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독일의 우생학적 산아 제한론이 소개되는가 하면 우생학과 유전학 등이 전시 체제로 나아 갈수록 일반적 담론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이미 낙태 후 안뜰에 암장(暗葬)하는 경우가411) 『시대일보』 1925년 6월 16일자. 나오는가 하면 오히려 낙태죄의 완화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동시에 산모의 건강상의 이유로 인공 임신 중절 시술의 경우에도 산부인과 의사가 단독으로 결정하는 것은 안되었고. 내과 등 다른 과 의사 2명 이상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모체의 건강보다 인적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평가되는 태아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정책 아래 임신 중절은 국법으로 금지되었으며, 일반 여성에게 낙태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같은 사회적 인식과 객관적 조건 가운데서 ‘애기 낫키 실은 어머니에게, 애기 낫코 싶은 숙녀에게’란 글은 불임의 원인과 치료법을 소개하였다. 인공 피임법으로는 삿쿠(고무로 만든 일제 콘돔) 사용이 권장되고, 피임약의 부작용이나 유산의 법적 문제 등 피임에 따른 부정적 측면이 주로 강조되었다. 그나마 무산자를 위한 산아 제한법이나, 인공 수태 문제에 관한 일본 사례도 드물지만 언급되고는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1920∼1930년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산아제한과 낙태를 구분하지 않은 채 동일시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하였다. 여학교의 교육자들조차도 피임법을 향락주의 및 개인주의의 망국사상으로 박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일제의 다산 정책에 따른 사회적 인식은 여성의 출산과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화시켰을 뿐, 당시 여성의 정체성과는 거의 무관하게 진전돼 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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